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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窓)/-. 아름다운 世上

나는 예술가 아닌 일꾼, 하루도 전각칼 놓은적 없어…

[장병욱 기자의 다시, 길을 떠나다] <22>

전각가 최규일

"나는 예술가 아닌 일꾼, 하루도 전각칼 놓은적 없어… 지금껏 작업한 돌 10톤 될 것"

 

 

강원 횡성군 공근면 산내리. 치악산 자락에 봄 기운이 내려 앉고, 저수지에서는 백로 한 쌍이 노닐었다. "이 일이 먹고 살기는 힘든데, 죄 짓고 살 일은 없어요." 산골 마을에 때아닌 흙먼지 일으키며 찾아온 취재진이 객쩍어졌다.

무애 양주동 선생이 그러했을까? 전각가 최규일(70)씨의 언행은 어디에도 거칠 것 없는, 무애(無碍)였다. 활달한 언어에 한자어와 육두문자가 무시로 몸을 섞었다. 그러나 상스럽지 않은, 날것으로서의 가치가 온존돼 있었다.

투박한 끌을 움켜잡고 돌을 파다 보니, 그의 손가락은 늘 붕대나 테이프로 칭칭 감싸져 있다. 석수장이 뺨치는 작업을 해 오면서도 지금껏 상처 한 번 안 났다. 정신일도의 결과다. 그러면서 "꼴리는 대로 가는 게 내 세계"라 한다.

낯가림이 유달리 심한 예술계에서 이렇다 할 신분적 배경도, 학맥도, 인맥도 없이 산골에 칩거하며 자기 세계를 정진해 온 그를 아는 사람은 '이 시대의 마지막 장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고서화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의 한켠에서나 흔히들 고급 인장 정도로 알기 십상인 전각이다. 그러나 그를 만나 숙성의 과정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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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일씨는 자신의 전각을 가리키며 "전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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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가 그러했듯, 전각가는 뛰어난 서예가다. 최씨 또한 그러하다. 거기에 서양화의 데생력까지 겸비했다. 최근 매스컴을 통해 전각이 고급 전통공예 제작기법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현실이 그는 측은한 듯했다. 이야기에 흥이 오르자 친교를 나눈 문인들과 두주불사하던 일도 호기롭게 풀려나왔다.

- 최근작은 무엇인가.

"재작년 도덕경을, 작년에는 금강경을 만들었다. 작년 12월 24일부터 지장경(地藏經)을 파고 있다. 한 판에 270자 새기는데, 금강경의 4배다."

- 모두 대작뿐인데.

"그렇다. 그 중에서도 연작(시리즈)만 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쓴 한시만 죽어라 판 적도 있다."

- 어떤 돌을 쓰나.

"한국서 나오는 단단한 돌만 고집한다. 해남 옥매산에서 나는 옥돌이다. 이번 지장경을 하려고 1년 반 전부터 재료를 준비했다. 우리나라 돌을 연습용 돌이라 하는 전각가도 있지만, 나는 이 땅에서 전각하는 사람이라 중국돌은 절대 안 쓴다."

- 전각(篆刻)은 일반에게 낯설다. 한문의 가장 원초적 형태인 전서를 돌에 새기는 일 아닌가.

"한국에 있는 전각가를 합치면 4~5만명이다. 그런데 한 사람도 작품은 않고 도장만 파니 그럴 수밖에. 매년 여는 전시회 '한국 전각 대전'을 보면 여전히 인감 수준이다. 가끔 인사동 가면 전각 국전 심사위원이라며 뻐기는 인간들 있는데, 그 사람들(일반 전각가들)과는 아예 게임을 안 한다."

- 작업은 어떻게 하나.

"새벽 3시에 일어나 불경을 듣는데, 요즘 듣는 것이 테이프 3개짜리 지장경이다. 들으며 향 피우고 8시까지 각(刻)한다. 밥 먹고 한잠 자고 밭을 돌다, 오후 6~10시까지 작업한다. 그렇게 해서 열흘 만에 경판 하나를 판다. 그것 말고, 보편 추상의 순수 조형물도 준비 중이다.

원래 글자라는 게 상징적 부적에서 출발한 게 아니냐. 날짐승, 들짐승, 수복(壽福) 등의 뜻에 맞는 글자들을 모아둔다. 조형성과 상징성, 거기에다 부적의 의미까지 모아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이다.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하다."

- 전각이라면 흔히들 도장 파는 일 정도로 알고 있다. 당신의 작품은 전각을 예술로 승화시킨 걸작으로 일컬어진다.

"그래도 예술가는 죽을 때까지 만족하면 안 돼. 나는 늘 부족하다. 전시회를 20번 정도 했지만, 하나도 안 팔았다. 국전이나 단체에 든 적도 없이, 타협 않고 내 세계에서 살아 왔다."

- 전시회는 소통을 위한 기회지만, 당신에게는 늘 아쉬웠다. 마지막 전시회는.

"2005년 10월 카이스트에서 전시회를 마치고, 그 해 말 양평에서 한 전시회였다. 나는 지금까지 20번 전시회를 했는데, 할 때마다 늘 새롭게 해 왔다는 것 한 가지는 자랑이다. (작품이 자연스럽게 축적돼서 갖는) 전시회란, 오줌 마려울 때 오줌 한 번 갈기는 일 아닌가.

전시회에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기에 나는 한 번도 내 돈 내고 전시회 한 적이 없다. 최근 전시회가 없었던 건 불경기 때문이다. 누가 하자면 또 하는 거다. 해우(解優) 한 번 하는 거다. 나는 예술가가 아니다. 일하는 일꾼, 그것도 초보다. 내 이상을 향해 갈 뿐이다."

- 첫 전시회는 어떠했나.

"1985년 경인미술관 초청으로 벌였던 전시회다. 내 전시회 소식을 듣고, 꽃다발이 곳곳에서 들이닥쳐 무슨 일이라도 터진 줄 알았다. 그러나 (그 같은 것들은) 제대로 일 못하게 하는 훼방꾼일 뿐이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됐다. 내가 원래 매스컴에 욕심 없었다. 부탁 한 번 안 했다. 그래도 전시회를 해마다 한 두 차례는 가졌으니 누구보다 부지런히, 열심히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 물감이 닿지 않는 바탕에도 마치 조각 작품처럼 촘촘한 선이 파여 있는데.

"정으로 치면 깨지기 십상이라, 그만한 힘으로 파 들어간 결과다."

- 특유의 기법인 일도일각(一刀一刻)법이란.

"보통은 글자 안을 끌로 파지만 나는 바깥을 파낸다(보통 글자가 하얗게 찍히는데 비해, 그의 작품은 글자 부분이 까맣게 찍힌다. 파내는 분량이 훨씬 많다는 뜻이다). 또 딴 사람들은 파낸 뒤 다듬지만, 나는 단 한 번으로 끝낸다."

- 일반적 부조 제작보다 훨씬 힘들겠다.

"여백을 음각으로 하는 것은 게으름 때문이다."

- 전각의 본고장 중국 사람들이 먼저 당신을 평가하지 않았나.

"1980년대에 문화계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전각하는 사람이라 했던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중국의 전각가로 이름 날리던 오창석, 제백석을 대단한 자라며 칭송하기에 '내 발톱의 때만도 못 한 놈'이라 대꾸해 줬다. 그 말에, 그 자리 모인 평론가들이 모두 발끈했다. 그래서 우리 집에 가서 보여주니 '당신 같은 (여백을 한 칼에 다 파내는) 사람 처음 본다'며 태도가 돌변하더라."

- 최근 예술로서 전각 작품에 관심이 일자, 매스컴에서 각광받는 전각가도 있는데.

"내 세계에는 근접 못 한다. 칼질하는 것 보면 안다. 장자 왈, 메뚜기가 거북이ㆍ코끼리의 생각을 알겠느냐고 했다."

- 전각은 어떻게 시작했나.

"나는 붓을 갖고 누드 크로키부터 했다. 젊은 시절에는 모델 그리는 자리만 있다면 달려가, 미친놈처럼 누드 크로키를 했다. 6ㆍ25 후 도장 파는 일과 인연 닿아 죽기 살기로 했다. 하루도 전각칼 놓은 적 없다. (닳아빠진 노트를 보여주며) 그 무렵부터 써 온 전각 일지다.

전각의 조형성을 높이려면 회화를 통해야 한다고 믿었다. 전각하면서 시장바닥 사람들 같은 주제로 사진도 찍었던 것은 그래서다. 요즘은 누드 크로키는 않고 동물을 주제로 수묵 크로키를 하고 있다.

1990년 독일문화원에서 열었던 전시회가 그랬다. 자, 보라. '계속해서 하루 두 자씩 팠다'는 구절이 있지 않느냐. 그 날 한 게 잘 됐나를 확인하는 일… 끔찍한 일이야."(달력에는 또 언제 어떤 작업을 했으며,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인지 등이 촘촘히 적혀 있다)

- 그런데 왜 하나.

"(뜸을 두다) 회의, 슬픔이 있다. 그러나 이런 거라도 하니 최규일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거지발싸개도 안 된다. 열심히 일하면 세상이 나를 도와간다."

- 지금껏 한 작업의 분량은.

"50살 때 보니 5톤 트럭 한 대 분이었다. 지금은 두 트럭쯤 되겠지. 지금껏 작업한 돌이 30만개다. 돌값만 수십억 들었을 거다."

- 자신의 작품을 팔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작품 팔아라, 낙관 파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절대 안 한다. 그러나 우리 집에 와서 나와 사귀면 공짜로 파 준다. 그 사람들이 결국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오면 그림 한 점씩은 공짜로 가져간다. 그러나 지금도 사자면 안 팔아. 내게는 두 가지뿐이다. 작업 열심히 했다는 것, 팔아먹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가가 부자라는 건 작품을 많이 갖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내 몸 떠나면 내 작품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옛날에 내 작품을 표구해 전시장에 갖다놓은 적이 있는데, 누구도 눈길 안 줘 다 썩어버렸다. 내 작품은 맛을 아는 사람들이 봐야 한다. 한국인들은 돈 되는 것만 좋아한다."

- 세상과 너무 떨어져 있다는 생각은 안 드나.

"나는 수지 안 맞는 거, (내 작품이) 안 팔리는 것에 대해 불만 없다. 그럴수록 내 작품의 가치는 올라가니까."

- 보유하고 있는 수많은 작품들은 어떻게 할 텐가.

"전시관을 준비 중이다. 10년 전 이 곳에 와, 4만평의 부지를 확보했다. 옛날에 만든 작품은 서울 집(강북구 수유동)에 있다. 나 혼자만 여기 살고 딴 식구들은 서울, 횡성을 오간다."

- 학교는 어떻게.

"성균관대 경제학과 63학번인데, 2000년 명예 졸업장을 주더라. 식구들 먹여 살리려 휴학하고 노동판을 돌다 보니 학교와는 인연이 끝이구나 싶었다.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는데, 학교에서 전각 부문의 공로를 인정해 명예 졸업장을 준다 해서 받았다.

- 일반인과의 거리가 너무 멀다.

"전시회 하라 해서 한 번 했는데, 사람들이 (내 작품을) 몰라. 이 세상 사물은 자기가 공부해서 아는 것만큼밖에 못 본다. 한국은 작품보다 이름이 중요한 풍토다."

- 그렇다고 대중과 길 트기를 포기할 것인가.

"한국 미술계의 기준이 있다면 이름(기존의 지명도), 국전 심사 여부가 전부다. 그러나 불공평한 게 결국은 도움이 된다. 그런 이유로 안 팔았으니. 만일 내가 떴다면 미쳤다고 이렇게 일하겠는가. 최후의 승리는 내 것이라는 믿음이다. 선비는 여러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만 무서워하는 법이다. 다 썩어도 한 놈이 견뎌야 새싹이 나온다고 믿는다."

- 딴 사람과 '게임' 안 하고 자족하며 사는 이유는.

"요즘 인기 있다는 한국 전각가들의 작품을, 중국인들은 콧방귀도 안 뀐다. 나는 내 작품들을 함부로 내놓지 않는다. (작품들을) 사실적으로 내가 갖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내가 인정 한 번 받으러, 들고 다니며 지랄할 필요가 있느냐."

- 앞으로 계획은.

"지장경 끝내고 난 뒤, 돌 없어 중단한 원각경과 법구경을 파겠다."

- 힘든 점은.

"힘들기보다 지루하다. 참아내는 것이다. 매일 하니 싫고, 신물 나고, 이 갈린다. 나는 평생 일손 놓은 적 없다. 허나 진정 겁나는 것은 칼ㆍ붓을 놓게 되는 일이다. 파다 보면 어깨에 힘줄이 돋고, 팔 다리는 저리고, 입에서 신물이 난다. 그래도 하는 게 도(道다). 죽기 살기로."

- 외롭지 않은가.

"나는 평생을 혼자가 아니면 가족뿐이다. 서울서 살 때는 프랑스, 일본에서 수시로 초청장이 왔는데 강원도 오고부터는 안 온다."

●가족은 나의 예술적 동지

'우리 시대의 마지막 장인'이라는 말 한 마디를 나침반 삼아 찾아 간 산골, 그의 작업장은 돌판과 먹, 끌이 전부였다. 작업은 세 단계로 나뉜다. 머릿속으로 한문을 형상화해내는 포자 혹은 장법 단계, 설계를 해서 먹으로 뜨는(글씨를 쓰는) 구상 단계, 쇠칼로 파는 단계가 그것이다.

출가한 딸을 제외하면 그의 가족은 모두가 예술적 동지다. 아들 정훈(39)씨는 동양화가이면서 도예가다. 앞뜰의 작은 가마가 바로 그의 작업실이다. 하루 종일 작업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어릴 적부터 봐 왔다고 한다.

서양화(유화)를 정공한 딸 정원(35)씨 역시 그렇다. 부인 노명숙(67)씨는 문인화가로 사군자를 필생의 작업으로 해 오고 있다. 동양화 그룹 '도우제'의 멤버로서 정기적으로 그룹전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들이 최씨로부터 귀가 닳도록 들어 온 말은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듯, 일은 항상 꾸준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몰아쳐 하는 작업 방식을 가장 경계하는 최씨는 현재 지장경 석판 130개 중 30개째를 파고 있다.

인적을 피해 작업하는 그를 가끔 TV가 취재하러 오겠다고 하지만 뜻을 이룬 적이 없다. "TV 촬영팀은 적어도 1주일은 일 못 하게 하거든요."

 

 

한국일보  2009.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