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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Life(삶)/-. 성공경영

강남 부자들은 어떻게 돈 버나…PB 동행취재 해보니

 

“계좌서 돈 하루만 놀려도 난리…사소한 정보도 리스크 체크”

은행, 증권사 등 금융회사들이 서울 강남 공략에 사활을 걸고 있다. 강남을 잡는 곳이 곧 한국의 ‘돈맥’을 잡는다는 까닭에서다. 경기 회복과 조정국면에서 강남 부자들은 돈을 어떻게 굴리고 있을까. 강남권 프라이빗 뱅커(PB)들과의 동행 취재를 통해 부자들의 돈 굴리는 법과 이들을 잡기 위한 PB들의 애환을 들여다봤다.

▶동양종합금융증권 강남역 지점 PB 김병국 대리


동양종합금융증권 강남역 지점 PB 김병국 대리가 채권수익률 변화추이를 고객에게 설명하고 있다.

 

“‘이자도 굴려야 이자’라고, 굴리는 게 하루만 늦어져도 난리납니다.”

지난 1일 오전 동양종합금융증권 서울 강남역지점의 김병국 대리(33)는 회사채 이자율을 체크하느라 컴퓨터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날 나온 이자는 그날 바로 재투자해야 직성이 풀리는 부자 고객들 때문이다. 김 대리가 관리하는 고객은 50여명. 금액은 600억원 정도다. 일과는 하루종일 고객과 상담을 하는 금융권 샐러리맨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유일한 차별점은 그가 상대하는 고객들이 수백억원 혹은 수천억원대 자산을 가진 준재벌 수준의 ‘부자’이란 점이다.

 

신문과 사내 정보지를 바탕으로 한 시황 회의가 끝나고 객장이 문을 열자 전화상담이 빗발쳤다. 특히 이날은 모 중견 건설사의 부도설이 나돌면서 채권시장 급랭을 우려하는 전화가 이어졌다. “○○건설이 유력하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 △△건설은 아닌 것 같습니다”라는 식의 30초 안팎의 짧은 통화만 수십 차례. 김 대리는 “사소한 소식이라도 내 돈이 언제, 어떤 스케줄에 따라 얼마나 들고 나는지 정확하게 알고 싶어하는 게 부자들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김 대리의 주요 업무는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투자계획을 짜주고, 새로운 투자처를 찾는 고객들에게 상품을 물색해 주는 것이다. 기본 능력은 물론 ‘감’과 ‘촉’이 요구되는 자리다. 김 대리가 느끼는 강남권 부자들의 최근 투자 성향은 안정적 자산운용이다. “지난해만 해도 신주인수권부사채 등 공격적인 투자를 주문하는 분들이 제법 있었는데, 올해는 안정 운용 쪽으로 기울면서 채권시장으로 눈을 돌리는 분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김 대리는 “이분들은 대부분 오랜 사업 경험을 통해 축적된 노하우와 특유의 ‘감’이 있다”면서 “최근 경기지표는 상승세에 있지만 ‘경기가 회복되려면 위험 요소도 많고 멀었다’는 게 부자들의 대체적인 반응” 이라고 말했다.

한 중년 고객이 만기채권의 재투자 상담을 하고 돌아간 뒤, 김 대리는 한 고객이 손수 작성한 자산관리표를 보여줬다. 예·적금, 채권, 주식, 부동산 등 자산항목과 투자내역, 만기일과 수익률 등이 적혀 있었다. 그는 “부자들은 몇백만원을 단 며칠 놀리는 것도 참지 못한다”면서 “자기 재산에 대해 이 정도는 꼼꼼해야 자산가 반열에 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오후 4시를 넘어서자 고객들의 발걸음이 다소 뜸해졌다. 낡은 중절모를 눌러쓴 평상복 차림의 손님 몇몇을 제외하면 매장 안은 한산했다. 하지만 이들 중절모 손님이야말로 수백억원대 자산가인 강남 큰손들이라고 그는 귀띔했다.

“부자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겸손하다는 거예요. 드러내고 자랑하지 않고, 상대방을 인정하려 하는 성향도 강하고요.” 김 대리는 “돈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들이지만 자신이 모르는 영역에 대해서는 무조건 꼼꼼히 설명을 듣고 경청하는 것이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우리은행 테헤란로 지점 정병민 PB팀장

우리은행 테헤란로 지점 정병민 PB 팀장이 외국인 코스닥 매매동향을 살펴보며 고객과 전화 상담을 하고 있다.

 

우리은행 테헤란로 지점의 정병민 PB팀장(47)은 강남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PB이다. 13년 PB경력 중 8년을 강남 고객들만 상대해왔다. 굴리는 자산은 1000억원. 어지간한 중소기업 1년 매출규모다. 출근 시간은 오전 7시30분. 그의 하루는 컴퓨터 e메일함을 체크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해외 애널리스트들이 보내온 경제보고서들과 신문 스크랩을 확인하던 그의 표정이 순간 심각해진다. 조선업계 자금사정이 나쁘다는 보고서였다. “현대중공업과 관련된 주가연계펀드(ELF)를 보유한 고객이 있어 요즘 조선업 동향을 주의깊게 보고 있죠.”

메일 체크를 끝내자 전화기를 붙잡는다. 미국 동부지역에 사는 고객과의 통화다. “빌딩 매입건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직접 한 번 보셔야 할 것 같은데 2월 중순쯤 귀국하시면 어떨까요?” 해외 큰손들이 한국에 묻어둔 몇백억원대 자산을 운용하는 일도 그의 몫이다. “부동산이 한물갔다고는 하지만, 강남 부자들의 주요 관심사는 여전히 부동산입니다. 자녀에게 대를 물려 재산을 넘겨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투자처란 생각 때문이죠.”

오전 10시. 여성 고객이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는 미리 작성해 둔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클릭했다. 고객의 집안 가계도 그래픽이 화면에 펼쳐졌다. 가계도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재산이 이전되는 과정에서 자산이 새어나갈 가능성과 해결방안을 설명했다.

때론 고객이 사망한 뒤 유언집행 서비스까지 맡는다. 지난해 한 고객이 사망한 뒤 그는 본의 아니게 자녀 간 상속 전쟁을 화해시키는 중책을 담당했다. 고인의 지인 중 중재 역할을 할 인물을 물색해 가족 간 대화의 장을 마련했다. 그는 “덕분에 가족 간 분쟁을 완화시킬 수 있었다”며 웃었다. 우리은행이 관리하던 고인의 재산이 자녀들의 주거래은행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막은 것은 물론이다.

상담을 끝내자마자 그는 숨돌릴 겨를도 없이 은행문을 나섰다. 서울시내 한 뉴타운 지역의 재개발조합 사무소가 목적지다. 1500가구가 넘는 뉴타운 지역주민들의 이주비 대출 거래은행으로 선정되면 지점으로선 큰 이득을 올릴 수 있다. 그는 “고객 한 분이 조합 사무소와 다리를 놓아주셨다” 며 “강남 고객들의 진가는 그들이 보유한 거액의 자산뿐 아니라 넓은 인맥에서 확인될 수 있다” 고 말했다.

이 같은 이점 때문에 최근 강남에선 큰손 고객을 뺏어오기 위한 금융기관 간 ‘PB대전’이 벌어지고 있다. 정 팀장도 은행과 증권사들이 경쟁적으로 강남에 점포를 늘리고 있는 것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PB들이 경쟁적으로 높은 금리를 제시하다보니 흔들리는 고객분들이 생겨나는 건 사실입니다. 때론 서운함을 느낄 때도 있지만 PB와 고객의 관계는 단순한 금리 숫자가 아니라 신뢰로 맺어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부자가 되는 비결은 눈앞의 작은 이익에 급급하기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다릴 줄 아는 것이기 때문이죠.”

 

 

경향신문 2010.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