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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窓)/-. 아름다운 世上

위안부 할머니, 쌈짓돈 4,000만원을 장학금으로

 

 

                연합뉴스  2006.11.29

150㎝가 되지 않는 작은 키에 기구한 세월의 흔적인 듯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의 황금자(82.사진) 할머니는 별 말이 없었다.

그저 "이왕 기부하기로 한 거 표시나게 쓰고 싶다"며 "생활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되풀이 할 뿐이었다.

종군 위안부 피해자인 황 할머니가 자신에게 지급되는 종군위안부 생활안전지원금 등을 아껴 모은 4000만원을 28일 형편 어려운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선뜻 내놓았다. 황 할머니는 보증금이 206만원에 불과한 서울 강서구 등촌3동 11평짜리 임대 아파트에서 13년째 살고 있다.

황 할머니의 수입은 매달 74만원씩 지급되는 종군위안부 생활안전지원금과 국민기초수급대상자 생계비 36만원 등 모두 110만원이다. 황 할머니는 이중 아파트 관리비 4만여 원과 각종 공과금, 식재료비 등 최소한의 생활비 30여 만원을 뺀 나머지 70여 만원을 매달 꼬박꼬박 모아 왔다. 안 입고 안 먹고 5년 이상 모은 돈을 아낌없이 사회에 내놓은 것이다.

황 할머니는 "나는 우리나라로부터 크게 혜택을 받은 것도 없고 불행하게 살았지만 젊은 학생들만큼은 행복했으면 좋겠다"며 "그래서 어렵게 모은 돈을 사회에 내놓기로 했다"고 말했다.

1924년 함경도에서 태어난 황 할머니는 서울로 올라와 식모살이를 하다가 열일곱 살 무렵 일본군에 끌려 흥남의 유리공장에서 일하다 20세가 되던 해 간도에서 위안부로 끌려갔다. 해방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식모살이밖에 없었다.

호적에는 남편이 사망한 것으로 돼 있으나 끔직한 위안부 경험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온전하게 기억을 하지 못한다. 황 할머니는 아파트 인근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를 일본군의 함성으로 착각, 학교와 동사무소를 찾아가 항의까지 했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다.

황 할머니가 장학금을 내놓은 데는 강서구 등촌3동 동사무소에서 일하던
김정환(41) 사회복지사의 힘이 컸다. 황 할머니의 신세 한탄을 참을성 있게 들어줘 마음을 얻은 김씨는 "내가 죽으면 남은 돈은 자네가 가져라"는 황 할머니의 말에 "그러실 거면 차라리 좋은 일에 쓰셔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황 할머니의 재산은 재단법인 강서구장학회에 전달됐다. 강서구장학회 기금은 황 할머니의 기부로 기금이 3억4000만원으로 불었다. 장학회는 매년 한 학생에게 '황금자 여사 장학금'이라는 이름으로 장학금을 지원할 계획이다.

 

 

중안일보  2006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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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할머니의 눈물젖은 장학금

서울 강서구 등촌 7단지아파트에 사는 올해 여든 둘의 황금자 할머니는 좀처럼 웃지 않는다. 괴팍하기로 소문난 심술보이고, 난방비를 아끼려고 방에서도 파카를 입는 구두쇠다. 그런 그가 평생 모은 돈 4000만원을 어려운 학생에게 써달라며 내놓았다.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에게 다달이 정부에서 주는 위로금(월 74만원)을 아낀 것이다.

이 돈은 원래 할머니 무덤 속에 갇힐 운명이었다. 평생 자신을 따돌려온 세상에 대한 한(恨)으로 뭉뚱그려진 돈뭉치다. “여섯 살 때 부모 잃고, 열일곱에 위안부로 끌려갔어. 돌아오니 아무도 없데. 평생 식모살이에 고물수집에….” 이렇게 모은 돈, 아무에게도 안 주고, 관 속으로 가져갈 거라고 했다. 할머니의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은 첫 마디가 뒤틀렸다. 위안부 때 군홧발에 짓밟혀 이렇게 됐다고 한다. 악몽은 요즘도 계속된다. 고등학생들이 교복 입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모습을 보면 일본군 병영 모습이 겹쳐 환청에 시달린다.



할머니는 세상과 담 쌓고 지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안식처인 ‘나눔의 집’에 들어가는 것도 마다했고, 일본대사관 수요집회에도 잘 나가지 않는다. 홀로 사는 노인이 많은 이 아파트에서도 ‘성질’로 이름났다. 집에 찾아온 사회복지사들은 물론, 동사무소에까지 쳐들어가 행패 수준의 거친 말을 내뱉기 일쑤였다.

이 벽은 2002년 사회복지사
김정환(41)씨가 오면서 허물어졌다. “처음엔 저도 얼마나 무서워했는데요. 그래도 미소로 녹였죠. 욕해도 생글, 소리 질러도 생글, 신문지 모은 거 잽싸게 낚아채 돈으로 바꿔 드리고, 명절 때는 우리 집 꼬마들 데리고 가 재롱 피우게 하고….”

황금자 할머니는 김 복지사에게 투항했다. 요샌 곧잘 ‘아들’이라고 부른다. 단축통화키 1번이 ‘아들’이다. “뜨거운 불에 들어가는 게 무섭다”며 꼭 매장해달라기에 김 복지사는 홀로 파주 천주교 공원묘지에 자리도 봐두었다.

김 복지사에겐 정말 듣기 싫은 한마디가 있었다. “나 죽으면 내 돈 네가 다 가져가라. 싫으면 내 무덤에 넣고”라는, ‘유언 반, 협박 반’의 말이다. 그때마다 “어려운 사람 위해 쓰는 게 아름답지 않으냐”고 권했지만, 할머니는 늘 묵묵부답이었다.

환청을 빼곤 비교적 건강했던 할머니는 올해 초 갑자기 앓아 누웠다. 김씨가 다른 동사무소로 전보된 직후다. 김씨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병실을 찾았다. “돌아가시는 줄 알았어요. 장례식도 준비하고, 저렇게 한스럽게 가도 되나 싶어 정말 많이 울고….”

하지만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다. 할머니는 석 달 만에 극적으로 완쾌됐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던 의사들도 깜짝 놀랐다. 지난 여름, 할머니와 김씨는 묏자리로 봐둔 공원묘원에 함께 갔다. 거기서 할머니가 말했다. “네 말대로 할란다. 그 돈, 똑똑한데 가난한 애들한테 쓰자.”

그 뒤 할머니는 바뀌었다. 거친 말도, 고함도 사라졌다. 노랑·분홍이 섞인 스카프를 두르고, 장미 장식이 달린 블라우스를 사 입는 등 멋도 부린다. 하지만 집에서 파카 입고, 빈병과 신문지 모으고, 아침·점심은 복지회관 무료급식으로 해결하는 건 여전하다. “언제 갈지 모르지만, 지금부터 또 아껴놓아야 될 거 아냐.”

할머니가 내놓은 4000만원은 오늘(29일) 오후
강서구청에 맡겨진다. ‘황금자 여사 장학금’(가칭)’이다.

 

조선일보 2006.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