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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초모랑마)를 인류 최초로 등정했던 뉴질랜드 산악인 겸 자선활동가 에드먼드 힐러리가 11일 오전 9시 오클랜드시티병원에서 타계했다. 88세.
뉴질랜드의 헬렌 클라크 총리는 11일 힐러리의 사망 소식을 공식 발표하면서 “스스로를 늘 ‘보통 사람’이라 말했지만 그는 진정 관대함과 결단력을 가진 영웅이었다”고 칭송했다. 클라크 총리는 “전설적인 산악인이자 모험가이고 또한 박애주의자였다”며 힐러리를 추모했다. 클라크 총리는 공식 발표에서 힐러리의 사망 원인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워낙 고령이었고 폐렴 등 노환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AP통신은 전했다.
뉴질랜드 오클랜드 남부 투아카우섬에서 태어난 힐러리는 16세 때 고향 부근 루아페후산을 등정하면서 산악인의 꿈을 키웠다고 회고한 바 있다. 스무살이던 1939년 알프스 남부 올리버산 등정을 통해 본격 산악인생을 시작한 그는 1953년 5월29일 영국 원정대에 소속돼 네팔인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와 함께 해발고도 8848m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첫발을 딛는 데 성공했다. 이후에도 힐러리는 남극점 도달과 히말라야 10개 봉우리 등정 등의 기록을 세웠다.이뿐만 아니라 외교관 겸 자선활동가로서 네팔의 셰르파들을 위한 일에 헌신, 산악인들은 물론 세계인들의 존경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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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에 도전과 용기 심어준 ‘모험가’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초모랑마)에 발을 디뎌 인류 탐험의 역사를 새로 쓴 에드먼드 힐러리는 산악인, 모험가로서의 명성 뿐 아니라 인생 그 자체로도 세계인들에게 교훈과 영감을 던져준 인물이다. 동행했던 셰르파가 아닌 자신만이 주목받는 것이 싫어 ‘에베레스트 첫 등정가’라는 타이틀 자체를 거절하기도 했던 힐러리는 평생을 셰르파들과 네팔 오지 빈민들 돕기에 바쳤다.
뉴질랜드의 작은 섬에서 태어난 수줍은 소년, 아내와 자식을 비행기 사고로 잃고도 삶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사람, 숨지기 1년 전까지 자신의 영혼의 고향인 네팔을 찾았던 힐러리의 타계 소식에 세계는 애도를 표하고 있다. 특히 뉴질랜드 국민들은 “위대한 키위(뉴질랜드 애칭)가 우리 곁을 떠났다”며 슬픔에 잠겼다.
1919년 오클랜드 남부의 투아카우라는 작은 섬에서 태어난 힐러리는 어릴 적 자동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학교에 다니면서 통학길에 책을 읽으며 넓은 세상과 모험에 대한 동경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열여섯살에 친구들과 루아페후산에 등산을 갔다가 내가 고통을 남보다 잘 참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회고한 바 있다. 1939년부터 본격적으로 탐험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는 1945년에는 남태평양 피지와 솔로몬 군도 탐험에 나섰다가 선박 화재로 큰 화상을 입기도 했다.
1950년대가 되면서 영국과 스위스 산악인들 사이에는 에베레스트 최초 등정 경쟁에 불이 붙었다. 1952년 스위스 원정대는 정상을 겨우 260m 앞에 두고 악천후로 돌아서는 비운을 맛봐야했다. 당시 스위스팀의 셰르파가 네팔인 텐징 노르가이였다. 이듬해 5월, 영국 원정대 소속으로 에베레스트를 향한 힐러리는 텐징과 함께 모든 산악인들의 꿈이던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는 데 성공했다. 캠프로 내려온 힐러리의 첫마디는 “결국 저 녀석을 때려눕혔어”라는 것이었다고 AP 등은 전했다.
힐러리와 텐징 중 ‘누가 먼저 정상을 밟았는가’는 오랜 미스터리였다. 힐러리가 등반 뒤 가지고 내려온 사진은 텐징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서있는 모습뿐이었고 정작 자신의 사진은 없었다. 힐러리는 자신이 다만 서구인이라는 이유로 영광을 독차지하는 것에 반대했고, 누가 먼저 발을 디뎠는지에 대해서는 수십년간 함구하다가 1986년 텐징이 사망한 뒤에야 입을 열기 시작했다.
1999년에 출간된 회고록 ‘정상에서(View from the Summit)’에 따르면 두 사람은 거의 함께 움직였으며 힐러리가 약간 먼저 발을 디딘 것으로 돼 있다. 이 등정 뒤 힐러리는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
힐러리는 1956~1965년 히말라야의 봉우리 10개를 등정했고, 1958년엔 남극점을 밟았다. 1977년에는 인도 갠지스강의 수원을 찾는 탐사를 벌였다. 1985년에는 인류 최초로 달을 밟은 미국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과 소형비행기를 타고 북극점에 도달했다. 이 해부터 4년반 동안은 인도, 네팔, 방글라데시 고등판무관(영연방의 대사급 외교관)으로 일하며 외교관 생활을 하기도 했다.
‘서 에드(Sir Ed) ’란 애칭으로 불렸던 힐러리가 존경받는 이유는, 자신에게 영광을 안겨준 셰르파들을 결코 잊지 않았기 때문. 그는 1962년 히말라야기금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해마다 히말라야 산지의 셰르파 마을을 찾아 오지에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교육을 돕는 활동을 벌였다. 개인적으로는 아픔도 있었다. 1975년 힐러리가 네팔에서 병원 건설에 앞장서는 동안 아내 루이즈와 막내딸이 카트만두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지는 비극을 겪은 것. 힐러리의 장남 피터는 2003년 4월 텐징의 아들 자믈링과 함께 선대의 업적 50주년을 기념하는 에베레스트 등반에 성공했다.
힐러리는 산악인으로서 언제나 ‘삶의 자세’를 강조해왔다. 2006년 뉴질랜드 등반가가 죽어가는 영국인 동료를 산에 버려두고 온 사건이 있었을 때는 “죽어가는 사람을 지나친채 정상에 오르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거세게 비난하기도 했었다. 힐러리는 지난해 1월에도 남극을 방문했고, 석달 뒤에는 카트만두를 찾았으나 노환으로 에베레스트 근방에 가지 못한 채 뉴질랜드로 귀환해야 했다. 그것이 생애 120차례가 넘었던 네팔 방문의 마지막이었다고 측근들은 전했다.
2008년 1월 11일 (금) 14:01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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