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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窓)/-. 아름다운 世上

"촛불대치중 전경아들과 마주쳤어요"

 

장윤선/무명씨 이야기 2008/06/05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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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오늘 나올 거야?"
"나갈 거야."
"조심해."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행진에 참여했다 시위군중과 전투경찰 대치전선에서 방패를 든 아들과 마주친 '촛불시민' 아버지 이야기가 잔잔한 화제다. 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형사였던 아버지가 쫓기던 대학생의 뒷덜미를 잡고 보니 아들이었다던 21년 전 추억까지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대한민국은 다시 국민항쟁으로 후끈 달아올라있다. 

지난 2일 새벽까지 밤이슬을 맞아가며 서울의 거리에서 1박2일 국민엠티를 치른 이웅 씨. 그를 첫 번째 '무명씨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소개할까 한다. 올해 마흔여덟인 이 아저씨는 인터뷰를 계속 사양했다. 세간에 별스럽게 취급되는 게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아유~ 넉 달 뒤엔 우리도 평범한 아버지와 아들이 될 텐데요. 아들은 아들대로, 저는 저대로 각각 자기 일을 한 건대, 공연히 말나는 게 싫은데. 쑥스럽고, 할 말도 없어요.^^"

재작년 10월 전투경찰로  입대한 아들이 올 10월이면 제대하는데 자칫 아들에게 불똥이 튈까 염려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겪은 그날의 기억을 잊기 어려운 모양이다. 그는 또박또박 그때 이야기를 전했다.


방패 들고 씩 웃는 아들 보고 머리가 '쭈뼛'

지난 1일 밤 10시, 이웅 씨는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앞 효자동 길에 서 있었다. '고시철회' '협상무효'가 적힌 빨간색 종이를 들고 다른 사람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시내 곳곳을 누비던 터였다.

밤이 이슥해지자 경찰 방송차량의 선무방송이 시작됐고, 옮기는 발걸음마다 행로가 막힌 시민들은 경찰을 향해 분노를 쏟아냈다. 서울 세종로와 광화문 일대 도로 한 가운데 세워진 닭장차와 닭장차 사이에는 사람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도록 촘촘히 차벽을 쌓았고, 전투경찰들의 군홧발과 방패도 간격을 두지 않고 딱 붙여놓았다. 청와대로 가는 길은 모두 막힌 상태였다.

가진 '무기'라고는 500ml짜리 생수통뿐인 시민들은 방패에 살갗을 대고, 군홧발에 운동화로 맞서며 대치했다. 경찰과 대치한 수만 군중 사이에 섞인 이 씨도 목이 쉴세라 구호를 외쳤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노래도 목청껏 불러재꼈다. 방패 든 전경들이 시민을 에워싸고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자, 그는 아들이 걱정됐다. 맨 앞줄에 선 전투경찰을 붙잡고 물었다. 

"어디 소속이에요?"
"…"

끝도 없이 이어지는 시커먼 개미행렬처럼 전투모를 착용한 전경대열 속에서 아들이 씩 웃는 게 보였다.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지만, 아들 녀석이 맞았다. 이 씨는 그날 오후 아들의 전화를 받아 출동할 줄은 알았지만 현장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막히면 돌아가면 되고, '되고송'의 주인공들은 모두 전투경찰을 향해 한발, 한발 움직였지만 이 씨는 한동안 한 발짝도 꼼짝 할 수 없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모든 사람들이 동공에서 흐려졌고, 아들의 웃는 얼굴만 또렷해졌다.

"더 있기 어려웠어요. 차라리 보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아서 그 자리를 떴죠."


"애가 잠 못 자는데 애비는 잠 자니? 같이 새워"

이 씨 입장에서는 같은 편끼리 싸우는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웠던 게다. 군복만 입지 않았다면 아들도 시민 편에 섰을 테니까. 안타까움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격렬해진 몸싸움에 한 몫이라도 보태야했지만 그는 발길을 돌렸다.

"어떻게 할까."
"뭘 어떻게 해. 애도 길거리에서 잠 못 자고 대치하는데, 애비는 잠자니? 같이 새워."

아내의 쿨한 목소리는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아들이 군복 입고 선 것이야 어쩔 수 없는 현실이고, 아이들이 미친 소를 먹고 광우병 걸리지 않도록 막는 몫은 당신이 해야 할 일 아니냐는 똑부러진 말솜씨에 그는 다시 삼청동으로 갔다.

"효자동으로 다시 가는 건 애비로서 도저히 못하겠고, 삼청동 쪽에 있었어요."

물대포에 맞아 추위에 떠는 사람들을 위해 모닥불을 지폈고, 목이 쉰 사람들에게는 생수를 사서 나눠줬다. 새벽까지 무리를 지어 촛불행진을 하는 군중에게는 박수를 보냈다. 시위 군중을 위해 기꺼이 몸을 던져 '자봉'에 나섰지만 맘 한켠에는 아들이 계속 남았다. 다치고 연행된 건 아니었지만 그 자체로 충분히 슬픈 현실이라는 생각에 맘도 서늘했다.

이 씨는 2일 아침 8시 30분이 돼서야 집으로 향했다. 길거리에서 아들과 더불어 꼬빡 밤을 새웠다. 서로 서 있는 위치는 달랐지만, 그렇게 한 공간에 공존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걱정하는 사이, 아들은 어땠을까.

"청바지에 하얀 운동화 신은 아저씨만 보면 아빤가 했어. 출동 끝내고 서에 복귀해서도 혹시 우리 아빤가 해서 이 사람, 저 사람 둘러보고 그랬지."

2일 오후 늦게 아버지 이 씨에게 전화한 아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옮겼다. 아버지 또한 아들이 시위대와 몸싸움하다 다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단다.

그는 경찰이 이름표를 떼고 시민을 향해 과잉진압을 한 바에 대해 상부의 지시가 없었다면 가능한 일이었겠냐고 의문부호를 찍었다. 군인은 상부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조직이지 결코 자의적 판단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게다.

"경찰 내부에도 불만이 상당한 것 같아요. 국민들은 비폭력 평화집회를 원하는데 경찰이 강경 진압했으니까. 저 같은 무지랭이는 잘 모르지만, 어청수 청장도 인적 쇄신 대상에 오르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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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이 씨는 군복무를 마친 예비역 복학생 형이었다. 최루탄 몽둥이를 피해 다니다 결국 경찰에 붙들려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이 씨는 21년 전 그날과 2008년 오늘을 비교했다.

"87년 6월항쟁 당시에는 민주대학생협의회, 서울시대학생연합 같은 지도부가 있었어요. 일단 지도부가 정하면 따라갔고,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지도부가 없어요. 그래서 혼란스럽기도 한데, 그래도 조화로운 게 참 신기해요."


80년대가 장엄했다면 지금은 재밌다

80년대는 장엄했다면 2008년은 신나고 재밌다는 게 특징이란다. 80년대에도 지금처럼 목에 태극기를 걸고 애국가를 불렀지만 그때와 분위기는 딴판이라는 것. 그땐 퍽 슬펐고, 심각했지만 지금은 화가 나고 불쾌한 상황인데 배꼽을 쥐게 하도록 웃긴다는 게다.

"요즘 군중은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 시위에 나서는 것 같아요. 행복한 삶의 질을 누군가 떨어트린다는 걸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여기는 거죠."

불과 1년 전만해도 한미FTA 반대집회는 썰렁했다. 운동권이 주도한 깃발과 플래카드, 피켓에 사람들은 식상해 했다. 그러나 벌써 한 달 째 이어진 촛불행진의 주인공들은 인터넷 카페 회원들이다. 패션과 인테리어, 요리, 프로야구 팬 등이 주를 이룬다. 유모차부대에 이어 '하이힐부대'도 출현했다. 미니스커트부대도 나왔다. 이들이 '대한민국 웰빙 저해세력'을 용납할 리 없다.

이 씨는 한때 20대 대학생들의 정치참여율이 낮아 대한민국의 미래는 암울하다고 평가했던 적이 있다고 했다. 인터넷에 빠져 지내는 10대에 부정적 시선을 던졌다고 했다. 촛불문화제를 통해 그는 선입견의 때를 벗겼다고 했다. 미래세대에 기대를 걸어도 충분하다고 판단했다는 게다.

"국민이 이명박씨와 5년 계약하고 청와대에 방 빌려줬는데, 계속 계약위반하면 위약금 물더라도 방 빼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나요? 미국산 쇠고기 문제는 새발의 피예요. 경부운하, 의료보험 민영화, 상수도 민영화 등등 어떻게 해요 정말?"

이 씨는 오늘의 항쟁이 좋은 선례를 남겨 정부는 국민을 이길 수 없다는 걸 똑똑히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통상마찰 운운하는데 국민건강보다 그게 우선이냐고 되물었다. 내각이 총사퇴해도 네티즌은 촛불을 끄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그 누구의 말대로 '닥치고 재협상'이 국민적 요구니까. 마지막으로 이 씨는 아들에게 딱 한 마디하고 싶다고 했다.

"제발 다치지 말아라, 하나뿐인 내 아들아."

▲사진=지난 3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촛불문화제. 이웅 씨는 사진 찍기를 극구 사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