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수행 공동체 다져온 500일
ㆍ사회적 역할 고민할 500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奉恩寺)는 국내의 대표적인 도심 사찰이다. 1200년 전 신라 고승 연회국사가 창건했으며 보우·서산·사명·한암·청담·석주 스님 등 고려·조선시대와 근현대의 기라성 같은 선지식들이 이곳에서 선풍을 드날렸다. 목조 경판을 모아놓은 판전(版殿)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마지막 글씨여서 의미가 각별하다. '무소유'의 법정스님도 1970년대 이곳에 머물며 한글대장경 역경에 몰두했다.
↑ 서울 강남의 대표적인 도심사찰이자 천년 고찰인 강남 봉은사에서 두문불출로 하루 1000배를 하며 ‘천일 기도 결사’ 중인 명진스님. 기도 500일째를 맞아 봉은사 다래헌에서 만난 스님은 “수행만이 한국 불교 중흥의 원력을 모으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조선시대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선종의 대표사찰)이었던 봉은사는 주변에 무역센터, 코엑스, 인터콘티넨탈 호텔, 아셈타워 등 초고층 빌딩들이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서울의 새로운 중심지인 강남의 노른자위 땅을 차지하고 있는 봉은사는 주지싸움에서 비롯된 '봉은사 사태' 등 조계종 분규의 진원지가 되기도 했다.
그런 봉은사가 최근 들어 확 달라진 모습을 보이면서 한국불교의 새로운 변화를 이끌고 있다. 그 변화의 중심에 주지 명진스님(58)이 있다. 2006년 11월 주지 소임을 맡은 스님은 '천일 기도 결사', 사찰의 재정 공개 등으로 불교계 안팎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독일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 뮌헨대 교수 등 각계 명사들의 봉은사 방문도 잦아지고 있다.
명진스님이 주지직을 맡으면서 처음 시작한 일이 천일기도다. 그가 "1000일 동안 기도 수행에만 집중하고 두문불출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주변에서는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산 속 암자도 아니고 서울의 대가람 주지가 일절 종무행정을 내려놓고 기도만 하겠다는 말에 신도들도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스님은 처음의 결의대로 2006년 12월5일부터 산문 밖 출입을 금한 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새벽 4시30분, 오전 10시, 오후 6시 등 세 차례 1000배 절 수행과 기도를 해오고 있다. 나머지 시간에도 신도들과 참선하거나 법문하는 등 늘 사찰 안에서 신도들과 함께 지낸다. 천일기도가 끝나면 그는 주지 한 차례 임기(4년)의 대부분을 절 안에서 기도만 하며 보내는 셈이 된다.
봉암사, 해인사, 송광사, 용화사, 상원사 선방 등에서 40안거를 마친 명진스님은 80년대 중반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대표적인 '운동권 스님'이다. 94년 조계종 개혁에 앞장서기도 했다.
17일로 천일기도 500일째를 맞아 반환점을 도는 명진스님을 지난 11일 그의 처소인 봉은사 다래헌에서 만났다. 판전 아래 담을 쌓아 단장한 당우가 다래헌이다. 정갈한 다래헌 뜰에는 매화, 진달래가 환하게 피었고 뒤뜰엔 시누대가 우거져 산중 암자 못지않게 '적정(寂靜)'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처음엔 갑갑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제는 편안합니다. 산중 선방에서는 도를 닦고, 도심 사찰은 포교만 한다는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어느 곳이든 스님들이 열심히 수행하는 것으로 신도들에게 감동을 주면 그것이 진정한 포교입니다."
스님은 "불교가 세상에 도움이 되는 힘은 수행과 기도에 있다"면서 "수행과 기도 속에 업(業)이 바뀌는 것을 체험하고 있다"고 술회했다. 그는 "도심 포교당은 한국전쟁 후 급속하게 교세를 확장하는 기독교를 좇아서 만들어진 것"이라며 "포교에만 치중하다보니 수행과 깨달음이 중심인 불교 고유의 정체성은 퇴색하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불교는 믿음의 종교이기보다는 수행을 통해 각성하는 종교입니다. 내면 성찰을 통해 탐진치(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에서 놓여나 세상을 객관적인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이제는 도심 사찰도 포교당의 역할에만 머물지 말고 물질세계에 지친 도시인들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수행할 수 있는 장소로 바뀌어야 합니다."
스님은 "출가한 스님들마저 물질의 포로가 되니 종단 분규와 갖가지 잡음이 일어난다"면서 "스님들이 수행자의 본래 모습대로 살아간다면 신라나 고려처럼 불교가 다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신(神)도, '나'라는 존재도, 시간이나 공간에 대해서도 확실히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뭔가 안다고 생각하는 데서 업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아는 것을 모두 내려놓은 상태에서 부처는 별을 보았고, 어떤 이는 닭울음 소리를 들었고, 어떤 이는 기왓장에 댓잎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스님은 '모름의 세계'에 대해 더 깊이 관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래헌 벽에는 '단지불회(但知不會)' 액자가 걸려 있다. '다만 모를 뿐'이라는 뜻으로, 모른다는 것만 제대로 알면 그게 바로 견성(見性)한 것이라고 했다.
스님은 지난 3일 봉은사를 찾은 울리히 벡 교수와 차담(茶談)을 나누면서도 "무엇인가를 확신할 때가 가장 위험하며, 이것만이 진리라는 생각 등에서 아만(我慢)과 독선이 나온다. 불교의 핵심은 어떤 것이 참부처인지 모른다는 것이며, 모름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어떤 종교나 사상이든 다 허구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위험사회' 등의 저자인 울리히 벡 교수는 "근대성이 자기 확신에서 출발했지만 현대사회는 불확실성에 휩싸여 있다는 점에서 스님의 말씀에 동감한다"고 화답했다. 그는 이날 경내 법왕루에서 열린 예불에 참례하는 등 한국 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명진스님은 벡 교수에게 염주를 선물하고, 그 어느 것에도 걸림이 없다는 뜻인 '무애(無碍)'라는 법명을 지어줬다.
주지가 법당을 떠나지 않고 매일 1000배 기도를 하면서 봉은사 신도들도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봉은사에서 이루어지는 하루 세 번의 예불과 발우공양, 참선, 기도, 법회, 교육 등의 수행과 전법 활동에 신도들이 적극 참여하고 있다.
봉은사 등록신도는 20만명에 이른다. 명진스님이 처음 주지를 맡았을 때 200명에 지나지 않던 일요 법회 참여 인원이 지금은 1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시민선방에서 참선하는 신도들도 늘어났다. 이들은 매일 새벽 4시부터 밤 10시까지 개인이 원하는 시간에 보통 2~3시간씩 수행하고 있다. 봉은사는 지난해 말 사찰의 재정상태를 공개해 종교기관 재정 투명화의 선봉에 섰다. 요즘은 불전함 열쇠를 신도들이 관리한다.
'봉은사 중장기 발전계획'도 내놓았다. 강남 최대 사찰인 봉은사를 한국 대표 전통 사찰로 복원하고, 시민들의 수행과 휴식이 동시에 가능한 도량으로 꾸미겠다는 내용이다. 이를 위해 박원순 변호사 등이 참여하는 봉은사 미래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미래위원회는 현대사회에서 불교의 역할을 찾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에 나눔을 실천하는 종교 본연의 역할도 포함됩니다."
명진스님은 지난 '500일간의 실험'이 봉은사를 수행 공동체로 바꾸는 것이었다면 앞으로의 500일은 불교와 사찰의 사회적 역할을 찾는 데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우리 모두가 인간 가치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짐승의 사회'와 다를 게 없다"면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은 이 시대 종교인들이 맡아야 할 소임"이라고 강조했다. 다래헌의 차맛을 음미하며 부처님 오신날 연들이 걸리고 있는 봉은사를 나서니 천지간에 봄이 절정이었다.
경향신문 2008.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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