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ews(窓)/-. 아름다운 世上

前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_"좌파? 난 스님파… 그냥 어려운 사람 편들어 주자는 것"

 

[이한우의 聽談(청담)]

길가다 억울하게 맞는 사람있으면 막아줘야 하는 것 아닌가…

 

부처님 오신 날
을 하루 앞둔 9일 오후 충청북도 제천 월악산 중턱의 암자로 스님을 찾아갔을 때 하늘은 당장이라도 폭우를 쏟아부을 듯 검게 흐려 있었다. "비가 온다고 해서 걱정했다"고 하자 "귀한 손님이 온다고 해서 내가 잠시 멈춰놨다. 내가 그 정도 공력은 된다"며 스님은 초면인 기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 [조선일보]월악산 산중 암자에서 만난 명진 스님은 친북좌파논란에 대해 "원래 나는 좌파라 불릴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다만 힘들게 사는 사람 편드는 게 좌파라면 좌파일 텐데 북한 지도부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어떤 체제건 국가지도자는 자기 국민을 굶겨서 천민취급을 받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고 명확하게 정리했다. /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명진 (明盡ㆍ61), 그 이름만으로도 한국 사회에서 하나의 사건이 되고 큰 논란을 부르는 인물이다. 지난주 보수성향의 한 지인이 "지금쯤
명진스님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재미있을 것"이라며 인터뷰를 주선할 의사를 밝혔다. 거절했다. 가끔 언론에 등장하는 유쾌하지 못한 뉴스들을 통해 그다지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만나봐라, 괜찮은 분이다"며 거듭 권유했다. 명진스님을 잘 아는 또 다른 보수성향의 지인에게 물어보았더니 결사 반대였다. "그런 사람 뭐하러 인터뷰하냐? 완전 좌판데."

고민중일 때 책 하나가 배달돼 왔다. 명진스님이 최근에 쓴 '스님은 사춘기'라는 가벼운 제목의 작은 책인데 재미있어서 쥐자마자 단숨에 다 읽었다. 하긴 그동안 '운동권 스님'이란 이력 말고 그의 과거 행적이나 생각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知彼知己(지피지기)…. 인터뷰를 권했던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처님 오신 날과 관련된 질문은 안한다, 개인 명진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볼 것이다, 본인이 불편해 할 수 있는 질문도 맘껏 하겠다, 이 세 가지를 받아들이면 하겠다." 얼마 후 연락이 왔다. "스님 쪽에서 좋다고 하셨다."

어머니의 자살, 동생의 죽음

―책에 "내가 여섯살 때 어머니는 세상을 버렸다"고 썼다.

"자살하신거다. 사업가였던 아버지의 외도로 인한 불화와 우울증 때문이었다고 한다. 삼베옷 입고 대나무 지팡이 짚은 채 화장터로 걸어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부산 당감동 화장터에서 어머니는 한 줌 재가 되어 나의 고향 당진에 묻혔다. 어머니를 잃은 깊은 상실감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죽는 건 뭘까, 사람은 왜 살까'를 묻게 했다."

―상황이 문제아 내지 반항아로 이끌었을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러셨나 싶은게 있다. 초등학교 시절 외갓집에 가면 귀한 외동딸을 잃은 외할머니는 나와 네살 아래 동생을 앉혀 놓고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에미는 너희 애비 때문에 죽었다. 크면 꼭 에미 원수를 갚아야 한다.' 또 친할머니는 내가 동생과 놀고 있는 것을 보시면서 늘 혼잣말로 '쯔쯧, 독한 것, 저 어린 것들을 놔두고 죽어?' 은연중에 내 마음 속에서 '어머니는 자식을 두고 죽은 독한 사람, 아버지는 커서 원수 갚아야 할 사람'이 돼 버렸다. 마음이 이렇다 보니 늘 나는 굉장히 불행한 사람이라는 피해의식으로 가득했다."

―아버지하고 사이도 안 좋았겠다.

"동네에 무슨 사고가 났다하면 범인은 십중팔구 나였다. 감당이 안됐던지 아버지는 동생이 있는 할머니댁으로 보냈다. 초등학교 때 여섯 번 전학을 다녔고 중학교도 두 군데 다녔다. 전학 많이 다녀본 사람은 안다. 왕따가 되거나 악바리처럼 굴어 짱이 되거나. 난 늘 '죽으면 그만이지'하는 생각으로 뭉쳐 있었기 때문에 싸웠다 하면 죽기 살기로 싸웠다. 초등학교 5학년 땐가 내가 훔치지도 않은 돈을 내가 훔친 걸로 아신 아버지가 매질을 했다. 그래서 축대에 서 있는 아버지를 밀어뜨리고 나도 마포대교 아래 벼랑천으로 뛰어든 적도 있다. 뱃사공이 건져서 살긴 했지만."

―듣고 보니 요즘 '잘' 싸우는 게 좀 이해는 된다.

"욱 하는 기질에다가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직선적 성격이라서. 죽기를 각오했으니 겁도 없고. 하하하."

―하나뿐인 남동생은 어떻게 죽었나.

"내가 제대하니 동생이 입대하겠다고 했다. 동생은 배문고 밴드부에서 바순을 불며 악장 노릇을 했다. 당시 해군군악대는 해외에서 운동경기가 있으면 지원을 나갔기 때문에 내가 해군을 권했다. 그런데 입대 한달 만에 충무 앞바다에서 훈련받던 배가 전복돼 훈련병 316명 가운데 16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1974년 2월의 일이다. 손윗사람의 죽음은 그저 슬플 뿐이지만 손아랫사람의 죽음은 애간장이 녹는다고나 할까? 장례 때문에 진해에 일주일 머무르면서 지나가는 해군만 보면 다짜고짜 달려가서 두들겨 팼다. 제 정신이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내가 다른 생각없이 한평생 중노릇 하는 것도 동생이 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출가

―스님이 될 운명이었나 보다.

"서울공고를 다녔는데 3학년 여름방학 때 출가했다 환속한 사촌형님이 '대학보내줄 테니 절에 가서 공부해라'고 해서 무주구천동 설천면에 있는 관음사라는 절에 가 있었다. 그때 해인사에서 왔다는 젊은 스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너무나도 기품이 있었다. 그 스님과 이야기하던 중 벼락맞은 느낌이 왔다. 세상사를 모두 다 안들 나를 모른다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스님의 말씀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원래는 그 길로 출가를 하려 했는데 아버지가 혹시 돌아올 경우에 대비해 고등학교는 졸업하고 출가를 하건 뭘 하건 하라고 해서 고등학교는 마쳤다."

―그리고 출가했나.

"그 사촌형님께 출가의 뜻을 말하자 해인사 성철 스님 앞으로 소개장을 써주었다. 당시 절집에는 '북 전강 남 성철'이라는 말이 있었다. 북쪽에서는 전강(田岡 1898~1975)스님이, 남쪽에서는 성철(性徹 1912~1993)스님이 가장 훌륭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해인사 정문 앞에서 소개장을 찢어버렸다. 취직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생사(生死)를 타파할 도를 구하러 가는 놈이 소개장을 들고 가다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좋게 말하면 자신감이고, 건방지다는 소리 많이 들었겠다.

"지금 송광사 방장(方丈)으로 계신 보성스님이 그때 행정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며칠도 안돼 '이래 건방진 행자 필요없다. 가라'고 호통을 쳤다."

―성철스님은 언제쯤 처음 뵀나.

"행자 생활 보름쯤 됐을 때다. '기왕 도를 구하러 왔으면 이기든 지든 제일 센 사람하고 붙어 봐야지'하는 생각으로 다짜고짜 스님이 계신 백련암으로 올라갔다. 시자(侍者-일종의 비서)스님이 가로막았다. 승복도 아직 입지 못한 속복(俗服) 행자가 큰 스님을 만나겠다고 하니 기가 찼겠지. 논산 훈련소 훈련병이 육군 참모총장 만나겠다고 한 셈이었으니까. 나도 순순히 물러나지 않고 맞서는 바람에 큰 소리가 났지. 그때 문이 열리면서 억센 진주사투리가 들려왔다. '뭐꼬? 와 이리 시끄럽노. 니 뭐하는 놈이고.' 나는 인사도 않고 성철스님을 째려보았다. 누군가 처음 봤을 때 기싸움에서 안 지려고 상대를 빤히 꼬나보는 습관이 나온거다. 그런데 스님이 웃으시며 '이노무 자슥, 니 와 그리 빤히 쳐다보노? 니 눈병 났나.' 그 길로 성철스님의 눈에 들어 백련암에서 행자 생활을 하게됐다."

―당대 최고의 스님 밑에 있어 많이 배웠을 것 같은데.

"당시 보통 10년씩 행자 생활을 할 때였는데 1년도 안돼 계(戒)를 주시겠다며 원일(圓日)이라는 법명도 지어주셨다. 장삼도 맞춰놓고 계 받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계를 받기로 한 닷새 전 새벽 백련암을 떠났다. 당시 구도심이 너무 뜨거웠는지 성철스님으로도 만족하지 못했던 것같다."

―도(道)가 뭐길래.

"가는 곳마다 도 닦는 스님들을 만나 보았는데 눈에 들어오는 도인은 없었다. 그래서 솔잎만 먹으면 도인이 된다는 말을 듣고 솔잎만 먹는 생식을 했더니 몸만 엉망이 되고 공부는 되지 않았다."

그렇게 떠돌다가 군에 입대했고 말년 병장을 두들겨패서 감옥과 월남 중 하나를 택일하라고 해서 그는 월남전에 통신병으로 '참전'하고 돌아왔다. 동생의 죽음은 그 직후에 있었고 동생이 죽던 그해 10월 법주사 주지 탄성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았다. 마침내 행자에서 스님으로 '승격'한 것이다. 그로부터 10년간 스님생활은 단조로웠다. 이 선방 저 선방 찾아다니며 '죽음'과 '나'를 화두로 40안거를 했다. 유신독재도 그와는 무관했고 80년 광주의 비극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것들은 그저 속세의 일일뿐이었다.

운동권 스님

―언제 어떤 계기로 소위 '운동권'에 눈을 떴나.

"1984년 해인사에 머물 때였다. 지명수배 된 운동권 청년 한 사람이 숨어들어왔다. 그는 광주항쟁의 비디오를 갖고 있었다. 충격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이럴 때 종교인은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해인사로 숨어드는 수배자들이 늘어났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점점 나는 사회참여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길을 가는데 누군가 매를 맞고 있거나 굶주림에 떨고 있다면 아무리 목적지에 도달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어떻게 했나.

"바로 뭘 어떻게 한 건 아니고. 사회과학쪽 책도 좀 읽고 수배자들과 대화도 나누면서 사회와 역사에 대해 공부를 하고 고민도 좀 했지. 소위 '의식화'훈련을 받은 셈이라고 할까."

―본격적인 운동권 스님이 된 것은 1986년이던데.

"그해 여름인가 대구 민통련 사무국장 권오국씨가 5·3 인천사태로 수배되어 해인사로 피신해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스님, 감옥에 가면 독방을 주는데 공부하기 아주 좋습니다'고 말하는데 귀가 번쩍 뜨였다. '독방이라고?' 무문관(無門關-닫힌 수행공간)이 따로 없겠네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주 감옥가고 싶어 안달이 났어. 아마도 사회참여의 고민은 깊어가고 불교공부는 안될 때라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원하던 감옥은 언제 갔나.

"그해 가을에 갔다. 9월 7일 해인사에서 승려대회가 열렸다. 불교재산관리법 철폐와 부천서 성(性)고문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하는 집회였는데 2000여명의 스님들이 모였고 내가 사회를 봤다. 그때 금산사의 한 스님이 부엌칼로 손가락을 자르고 하얀 천 위에 '불자여, 눈을 떠라!'고 썼다. 순간 참석한 스님들이 모두 흥분해 대회는 과격한 시위로 바뀌었다. 그때 열아홉명이 구속되고 여러 사람이 수배가 됐는데 나는 그 구속도 안되고 수배자 명단에도 없었다. 속된 말로 '쪽' 팔렸다. 그 다음달 서울 조계사에서 10·27 법난 규탄대회를 하게 되었는데 누가 그랬다. 대회 위원장을 맡으면 무조건 잡혀가 삼년쯤 감옥에 산다고. 그래서 위원장 맡았는데 조계사는 경찰들이 봉쇄했어. 그래서 봉은사로 몰려가서 선불당을 차지했지. 그게 나와 봉은사의 인연이다. 다음날 가두시위에 나섰다가 결국 경찰에 붙잡혀 '닭장차'에 실려갔지. 두달 살다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고 나왔다. 그때 내 담당변호사가 조영래 변호사다. 조 변호사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감옥 나와서는?

"졸지에 '불교 운동권 스타'가 됐더라구. 난 원래 해인사 선방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중앙승가대 학생들이 와서 개운사 주지를 맡아달라고 했다. 처음엔 거절했는데 주변 스님들이 한국불교를 바꿀 생각이 있으면 맡아보라고 해서 1987년 3월 개운사 주지로 갔다."

이때 이미 명진스님은 봉은사 주지 때 보여준 파격의 씨앗을 슬쩍 드러냈다. 부처님 오신날에 다는 등(燈)값에 차별을 두는 관행을 없애버렸다.

"등을 다는데 빈부가 어디 있는가. 절에서 등값을 결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산을 해보니 그 전해와 별로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운동권이 된 스님은 점점 정치에 얽혀들어간다. 그것은 어쩌면 불교의 초라한 자화상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절이 군홧발에 짓밟혀도 정권에 항의 한번 제대로 못하는 불교의 처참한 모습이 자존심 상하고 가슴 아팠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은 우리 수행자들에게 많은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목사나 신부들보다 더 격렬하게 사회의 불의에 항거하며 뛰어다녔다."

그는 누구보다 불교를 사랑했다. 사회와 역사에 눈을 떴다고 했지만 사회와 역사에 눈을 뜨고 보니 초라한 불교의 위상이 드러난 것일까? 그는 사회운동에 회의가 들었다고 했다. '내가 시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깎았던가?'

경상북도 문경 봉암사로 숨어든 것도 그 의문을 풀기 위함이었다. 그곳에서 훗날 조계종 종정이 되는 서암스님을 모셨다. 그런데 당시 봉암사는 108평짜리 새 법당을 짓고 있었다. 싫었다. 성철스님이 그리웠다고 했다. 백련암에 가서 면담을 신청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면담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후 한동안 그는 용맹정진에 들어간다.

정치와 종교, 혹은 불교

―다시 전면에 등장하게 된 계기는?

"1994년 의현스님의 삼선에 반대하며 '개혁파' 스님들이 개운사에서 단식을 했다. 다행히 분위기가 개혁파에 쏠리며 4월 10일 총무원측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전국승려대회가 열렸다. 그날 나는 대중연설을 맡았다. 그런데 대회 끝나고 스님들이 각자 절로 돌아가버리면 모든 것이 원위치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 종단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저는 불문(佛門)을 떠나겠습니다. 다시는 이 가사를 입지 않겠습니다'며 가사를 벗어 원로스님들 앞에 놓았다. 참석했던 많은 스님들이 울고 있었다. 결국 의현스님은 물러났고 종단개혁의 발판이 마련됐다."

―제3자 입장에 보면 불교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부끄럽다. 개혁만 하면 잘 될 줄 알았는데 좀 지나고 보니 한 명의 의현이 사라지고 25명의 의현, 100명의 의현이 불교를 지배하고 있었다. 결국 위로부터의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봉은사 개혁실험은 그때부터 생각한 것인가?

"불교 내부에서 기풍을 바로잡아야 불교가 바로 선다는 생각을 했다. 운동권 중 시절에도 사회과학을 통한 불교개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는 반대였다. 불교 자체를 깨끗하게 함으로써 중생도 구제하고 사회도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일관된 생각이었다."

―천일기도와 재정공개는 아무래도 충격적인 조치였다.

"사실 큰 절의 주지는 할 일이 많아 천일기도를 하면 안된다. 그러나 윗분들한테 돈 안갖다주고 포교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에서 천일기도와 재정공개를 했다. 신도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등록신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2006년 취임 당시 80억원대이던 예산은 2010년 136억원대로 늘었다. 불전함에는 1년에 십몇억원의 돈이 쌓였는데 신도들에게 열쇠를 맡겨버렸다. 그전까지 그 돈은 주지의 용돈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이 많이 생겼을텐데.

"겉으로는 다른 절들에서도 칭찬을 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전부 뒤에서 나를 때려죽일 놈이라고 욕하고 있었다. 정치권력에 밀린 것도 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봉은사 주지에서 쫓겨난 게 다른 절들의 시샘 때문이었던 것같다."

―문제의식은 좋았지만 해결책은 미숙했던 것 아닌가?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불교계의 강남좌파', '불교계의 노무현' 등의 소리를 들었던 것이 봉은사 주지 시절인데.

"난 좌파적 우파이지 정통 좌파는 아니다. 굳이 말하면 스님파다. 대한민국 주류 사회의 중요성은 인정한다. 그러나 지금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 그것을 나는 외면할 수 없다. 그 때문에 나를 좌파라고 손가락질 한다면 감수하겠다. 길가다가 억울하게 얻어터지는 사람이 있으면 막아줘야 하는 것 아니겠나."

―여러가지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 기질이 통하는 것같다.

"노통이 초단이면 나는 입신의 경지에 든 사람이지. 내가 이명박 대통령 비판을 많이 하는데 언론들이 가만히 있으니까 그러는 거다. 도올(김용옥씨)이 그러데. 한국불교 1700년 역사상 임금이건 대통령이건 정면으로 최고권력을 가장 많이 비판한 중이 바로 나라고. 나야 가족이 있나 지킬 게 있나, 나같은 사람이라도 할 말은 해야지."

―이명박 대통령이 왜 그렇게 못마땅한가?

"불교계 입장에서 보면 역대 최악의 대통령이다. 거짓말을 너무 쉽게 한다. 잘못했으면 정직하게 사과하고 바로 잡아야지 너무 뻔뻔하다. 그에 비하면 박근혜 전대표는 진정성이 있다. 나는 좌고 우고 떠나서 진정성 있는 사람이 좋다."

―정치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나만 더 묻자. 손학규 민주당대표와도 인연이 깊다.

"이런 이야기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난 그 사람 안 믿는다. 자기가 오랫동안 몸담았던 정당을 떠나면서 '유신 잔당'이라고 비난했다. 그냥 박근혜가 너무 강해서 한나라당에서는 가망성이 없어 떠난다고 했다면 나는 지금도 그 사람 지지했을거다. 그런데 자기가 물 떠먹던 우물에 침뱉고 떠났다. 차라리 야권에서는 문재인처럼 진정성 있는 인물을 발굴해서 박근혜에 맞서야 한다."

3시간 반이 흘러도 이야기는 시작인지 중간인지 끝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말을 끊어야 했다.

―여전히 봉은사 주지 자리에 대한 미련이 있나.

"지금도 주말이면 많은 봉은사 신도들이 이 먼곳을 찾아온다. 그때마다 미안하다. 이부장, 특종 하나 줄까. 내가 서울로 돌아가면 그때는 봉은사 주지보다는 조계종 총무원장 꼭 해보고 싶다. 원래 종정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힘이 없더라. 불교를 바꾸려면 총무원장 자리가 꼭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선거를 통해 뽑는 총무원장 자리는 관심 없다."

―선거가 아니면 무슨 방법이 있나.

"나야 모르지."

암자를 내려오면서 든 의문 하나. 명진스님은 서울로 돌아올 수 있을까?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문자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민주당 지지율이 한나라당 지지율을 처음으로 앞섰다는 여론조사결과였다.

 

조선일보  2011.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