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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窓)/-. 아름다운 世上

`한옥지킴이' 피터 바돌로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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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한옥지킴이' 피터 바돌로뮤씨

"우리에겐 모두 자기 집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정부가 짓밟아서는 안 됩니다."

재개발로 사리질 위기에 처한 서울 동소문동 한옥을 지키기 위한 소송에서 이긴 푸른 눈의 미국인 피터 바돌로뮤(61)씨는 4일 성냥갑 같은 고층 콘트리크 건물로 대변되는 관 주도의 재개발 방식에 이같이 일침을 가했다.

한옥을 사랑하는 미국인 바돌로뮤씨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6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스물다섯 혈기왕성한 청년이던 1968년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 땅을 처음 밟았던 것.

한국의 교육 수준을 높여보겠다는 청운의 꿈을 가슴에 품은 이 청년은 강원도 강릉의 99칸짜리 선교장에서 5년 살며 한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주인 할머니가 빈방이 많다고 지내라고 해서 들어갔죠. 할머니 덕분에 한옥이 왜 이렇게 생겼는지 많은 것을 알게 됐어요"

그는 한옥의 매력에 푹 빠져든 나머지 봉사단 활동이 끝나고서도 한국에 눌러앉기로 마음먹고 1973년엔 서울로 이사했다.

바돌로뮤씨는 당시 흔치 않던 여의도 시범아파트에 들어갔는데 선교장에서 지낸 세월이 자꾸 떠올라 결국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한옥에서 살겠다며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찾은 새 보금자리가 지금 사는 동소문동의 14칸 한옥이었다.

열 길은 됨직한 굵은 은행나무가 한가운데 서 있는 아담한 마당이 내려다보이는 대청마루에 걸터앉은 그는 "당시 돈으로 1천200만원이었어요. 주변 사람들이 비싸게 샀다고 다 바보라고 했는데 그 뒤로도 빚 갚느라 한동안 고생했죠"라며 웃음을 지었다.

독신인 바돌로뮤씨지만 이 집에서 보낸 35년의 세월은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형편이 어려워 서울에 유학 오기 어렵다는 지방 학생들의 딱한 사정을 듣고 1984년부터 대학생들을 매년 대여섯 명씩 자기 집에 `공짜 하숙생'으로 들였다.

물론 세상에 100% 공짜는 없었다.

"일은 해야지. 집을 관리하려면 손이 엄청나게 가요. 특히 정원 가꾸기는 혼자 못해요. 학생들이 그걸 해주지. 내가 출장 갈 일도 많으니까 집도 봐야 하고"

그렇게 이 집을 거쳐 간 학생들이 60명은 족히 된다고 한다.

일가를 이뤄 나간 당시의 대학생들은 지금도 주말이면 아들 딸의 고사리손을 붙잡고 추억이 어린 동소문동 `파란 눈 할아버지' 집을 찾아온다고 한다.

이런 바돌로뮤씨의 평온한 일상이 깨진 것은 동네가 재개발지구로 지정되면서부터.

그는 "쇼크를 받았지. 재개발이라면 원래 달동네 판잣집 같은 데 사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거 아니에요. 우리 동네는 한옥들도 멀쩡하고 위험하고 낡은 불량 동네 아니란 말이에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바돌로뮤씨는 멀쩡한 한옥을 `노후ㆍ불량주택'이라며 재개발 대상으로 보는 정부의 정책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이제 만 채도 안 남은 한옥을 없애는 건 고려청자, 조선백자, 김홍도 그림을 다 없애버리는 거와 뭐가 다른가요"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바돌로뮤씨가 바라는 건 획일적인 관 주도의 재개발이 아닌 동네 주민들이 중심이 돼 스스로 살고 싶은 동네를 가꿔나가는 것이다.

그는 "우리 동네 근처에 아리랑 고개가 있어요. 아리랑노래의 그 아리랑 고개요. 미아리에는 점집도 많지요. 이런 게 다 한국적 것들이잖아요. 지금은 몇 채 남지 않았지만 한옥들이 중심이 돼서 북촌 같은 새로운 문화동네를 만들어 보는 게 이제 제 남은 희망입니다"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9.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