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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窓)/-. 아름다운 世上

한평생 잘 살았으니 더 이상 돈 욕심 없어

 

<지역과 더불어>“한평생 잘 살았으니 더 이상 돈 욕심 없어”

“돈 있으면 안 되는 일 없는 황금만능시대에 떳떳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거액의 돈을 벌고, 그 돈을 슬기롭고 뜻 깊은 일에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거인이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송금조 선생은 우리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고 가장 필요한 것은 교육과 문화라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이 신념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1000억원의 기금을 출연해 탄생한 것이 바로 경암교육문화재단입니다. 송 선생은 많은 역경을 이기고 팔십 평생을 아름답고 거대한 예술품으로 가꿔 왔습니다. 그 쌓아올린 예술품의 높이를 더욱 키워가기를 축원합니다.”지난해 11월17일 부산 해운대 ‘누리마루APEC하우스’에서 열린 제2회 경암학술상 시상식장의 김태길 학술원 회장의 축사내용이다.

2003년, 2004년 대학과 문화교육재단에 평생 피땀 흘려 모은 재산 1305억원을 기부했던 향토기업인 경암 송금조(83·사진) 태양사 회장. 개인으로는 최다 기부금을 냈으면서도 구두와 옷을 10년 이상 사용하는 등 근검절약한 생활로 더욱 세인들을 숙연케 했다.

그는 기부금이 인재양성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여전히 검소한 삶을 살고 있다. 특히 권력층의 신정아씨 비호 의혹 사건 등으로 온갖 ‘검은돈’이 난무해 기부문화까지 위축되지 않을까 우려되는 시점에서 송 회장의 삶은 더욱 귀감이 되고 있다.

인터뷰를 고사하는 송 회장을 설득해 15일 오후 부산시 부산진구 부전1동 송 회장의 사무실과 집에서 어렵게 만났다.

경암교육문화재단의 상임이사인 부인 진애언(전 경희대 음대교수) 여사가 함께 자리해 보충설명을 해 줬다.

자그마한 키의 송 회장은 지팡이를 짚고 있지만 거동에는 불편이 없어 나이에 비해 건강하고 젊어보였다. 한때 부산지역 개인소득 최고를 기록했던 기업인답지 않게 캐주얼 면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제일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렇게 어렵게 번 돈을 어떻게 선뜻 희사할 생각을 하셨습니까.”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송 회장은 진 여사의 재촉에 겨우 운을 뗐다.

“별로 아는 것도 없고 기사로 낼 만한 사람도 아닌데 뭐하러 여기까지 오셨어요.” 그는 인터뷰내내 막내아들뻘인 기자에게 꼬박꼬박 극존칭어를 썼다. 자기관리에 엄격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제3회 경암학술상 시상식을 11월2일 한다는데 지방에서 출범했으면서도 최고의 학술상으로 명성이 높다던데요”라며 화제를 돌렸다.

“아직은 초기단계입니다. 화단에 물을 잘 줘야 꽃을 피우듯이 잘 키워 나가는 것이 저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권위있는 상이 되고 한국의 노벨상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죠.” ‘노벨상’이라는 자신의 표현이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기 위해 수상자 선정 때 엄정하고 정확한 심사를 하고 있습니다.” 진 여사가 설명을 했다. 경암학술상(위원장 안병영 연세대 명예교수)은 2004년 2월 송 회장이 부동산과 현금 등 1000억원을 출연해 만든 재단기금으로 2005년부터 수여되고 있다. 인문·사회, 생명·과학, 공학, 예술 분야 등을 4개 분야로 나눠 최고의 창의적 업적을 이룬 사람들을 선정한다. 상금은 1인당 1억원씩으로 최고수준이다. 내년부터는 생명·과학분야를 두개로 나눠 5개부문을 수상할 계획이다.

각 분야에 5~7명씩의 석학들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지연, 학연 등을 완전배제하고 학문적 성과만 가지고 엄정한 심사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올해 3회 수상자까지 12명이 배출됐지만 부산 출신이 한 명도 없을 정도다.

그는 또 지난 2003년 부산대가 경남 양산에 제2캠퍼스를 조성하면서 부지비용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을 듣고 305억원을 쾌척했다. “최신식 교육시설에서 지방 명문대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데 보탬이 되라는 뜻이었습니다. 부지 값이 304억원인데 4자가 안 좋아 305억원을 연차적으로 기부하고 있죠. 그런데 이 금액이 저의 뜻과 달리 일부 연구비 등으로 쓰여 아쉽습니다”

요즘 세태에 대해 묻자 얘기가 술술 풀렸다.

“예전의 어려운 생활에 비하면 한국은 엄청난 발전을 했죠. 배가 고파 참지 못했던 청소년 시절을 생각하면 우리 민족의 저력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지금이 더욱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더 독해야 해요. 인재양성을 하지 않으면 무섭게 따라오는 중국 등에 곧 뒤처지고 말 것입니다. 한때 세계최고 품질로 인기를 모았던 금속제품도 인건비 때문에 중국으로 다 넘어갔습니다. 기술력 향상을 위한 교육이 중요하죠. 교육문화재단을 만든 것도 인재양성을 위해서죠.”

그는 “국가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자기만 생각하는 정치인과 노조가 큰 문제인 것 같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의 국가관이 투철하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송 회장은 현재 사회활동을 하는 40, 50대의 아버지 세대다. 일제 때 태어나 가장 수탈이 심했던 일제 말기에 청소년기를 보내고 좌우이념분쟁, 보릿고개, 개발기, 민주화 시기 등 온갖 역정을 거쳐왔다. 그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7세 때 부산으로 와 온갖 일을 하며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그가 만든 숟가락, 나이프, 포크 등 식사도구들은 그 품질을 인정받아 독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데 이어 유럽전역과 미국으로까지 수출됐다. 1980년대 말에는 한때 직원이 2000명을 넘었고 개인소득액으로는 수년동안 부산에서 1위를 기록했다. 성공비결을 물었다.

“큰 비결은 없습니다. 그저 열심히 성실하게 살았죠. 한창 일할 때는 밤 12시에 자고 오전 4시에 일어났죠.” 진 여사가 자세한 설명을 했다. “회장님은 남들보다 한발 앞서 사업구상의 아이디어를 내고 고민했던 것 같아요. 새로운 사업에 올인하는 것보다는 안정에 바탕을 둔 철저한 분석으로 업종을 바꿔가면서 계속 성공을 이뤘죠.” 송 회장이 생각이 난 듯 말했다.

“오징어 가공 수출업을 하기 위해 직접 일본에 가서 보름동안 일본인들의 입맛 등을 면밀히 분석했습니다. 그냥 수산물을 파는 것이 아니라 오징어를 가공해서 포장해 팔면 수익이 10배가 남았죠.”

그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세종대왕,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했다. 세종대왕은 세계에서도 가장 우수한 글자인 한글을 창제해 대대손손 민족발전의 기틀을 마련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좌우 여야대립이 심각했던 시기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했다는 점에서, 박 대통령은 우리 경제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꼽았다. 특히 박 대통령 얘기를 많이 했다. 실제로 집에는 박 대통령에 대한 책이 전집을 포함해 20여권이나 있었다.

“박 대통령이 1960년대 말 양조장, 정미소를 하는 사업자들을 모아놓고 여러분들이 그나마 자금여력이 있는 계층인 만큼 제조업을 해보라”고 권해 기계금속업을 하게 됐다고 기계금속업을 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아호인 경암(耕巖)이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바위밭을 경작한다는 뜻입니다. 부산 출신으로 문단의 큰 별인 요산 김정한 선생님이 지어주셨죠. 돌과 자갈밭을 갈아 옥토를 일구듯 열심히 살라는 뜻입니다.” 그처럼 자기 호대로 열심히 삶을 산 사람도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초등학교만 졸업한 학력에 너무 아쉬움이 많아 야간 상고를 다니기도 했지만 좀처럼 더 배울 시간을 내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사업을 하면서 같은 나이 또래보다는 주로 나이가 많고 학식이 많은 사람들을 사귀려고 노력했다. 요산 선생은 물론 당시의 유명한 의사와 교수 등도 직접 찾아가서 같이 말술을 마시며 수십년간 교분을 이어왔다고 했다.(그는 당시는 술이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및 사교 도구였고 젊을 때는 주량도 상당했다고 말했다.)

사무실 인근 그의 집으로 진 여사가 안내했다. 송 회장은 처음에는 “뭘 누추한 집까지…”라며 내켜하지 않았다. 마당이 있는 2층집 양옥이다. 송 회장은 여기서 58년째 살고 있다고 했다. 진 여사가 최근 내부 개조를 해서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수천억원대 재산가의 집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초라하고 단출한 살림이다. 실내는 더욱 썰렁했다. 고가 미술품, 제대로 된 장롱, 장식장도 없다. 서가와 책들, 1970년, 80년대 진 여사가 기념으로 걸어놓은 예전 독창회 포스터 외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진 여사는 미국에서 음악학과 교육학 등 2개의 박사학위를 받은 성악가다.

송 회장은
헤르만 헤세의 ‘정원 일의 즐거움’과 그림이 많은 명상집 등을 읽고 있었다. 시력이 별로 좋지 않아 글자가 큰 그림집 등을 선호하는 듯했다. 진 여사가 고구마를 삶아서 내왔다. 송 회장이 좋아해서 하루 한두 차례 간식으로 삶아 먹는다고 했다.

건강비결에 대해서는 “젊었을 때 먹을 것이 별로 없어 고추장에 밥만 비벼 먹는 ‘웰빙식’을 오래 했기 때문”이라고 진 여사가 농담으로 대신 대답했다.

“왜 돈이 아깝지 않겠냐마는 번 돈을 가지고 갈 수도 없는 것이고 국가를 위해 쓴다면 더 좋은 것 아닙니까. 젊은 사람들이 교육을 잘 받아 국제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게 살아야지요. 저는 한평생 잘 살다 이제 가는 것이고 여생을 보낼 정도의 돈만 있으면 되죠.” 첫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제서야 돌아왔다. “나이들면 다 파입니다.(안 좋습니다). 시력도, 귀도, 목소리도 서서히 가게 돼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더욱 열심히 해야지요”라는 젊은이들에 대한 당부로 인사를 대신했다.

송금조 회장은 누구

경암 송금조 회장은 1924년 경남 양산군 철마면 송정리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8남매 중 다섯째이고 아들로서는 막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사를 짓다 17세인 1941년 부산으로 와서 약품도매업의 점원으로 일했다. 타고난 근면성과 몸에 밴 검약정신으로 1948년 독립해 태양약품업을 창업하면서 직접 사업의 길로 뛰어들었다. 이후 수산가공업, 양조장, 정미소 운영 등 안 해본 사업이 없을 정도로 억척스럽게 돈을 벌었다.

1974년 태양사와 태양산업사를 잇따라 창업, 금속기계산업을 시작해 독일 등 유럽에 최고의 품질을 인정받으면서 사업이 성장했다. 1986년 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산업훈장과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고, 1987년 ‘1000만달러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수익금의 사회환원에 나서 1985년 태양학원(
경혜여고)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으며 2003년에는 부산대에 인재양성을 위해 305억원을 기부했다. 2004년 거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1000억원으로 경암교육문화재단을 설립해 국내 최고의 학술상인 경암학술상을 만들어 시상해오고 있다. 재단 이사장을 맡아 교육, 문화, 예술, 국제교류 사업도 지원해오고 있다. 학술상 운영에 이어 우수 박사 논문작성자에 대한 지원 등의 사업도 실시할 계획이다. 슬하에는 자녀가 없다.

 

2007년 10월 18일 (목)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