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중소 제조기업 중 수출실적이 전혀 없는 기업이 절반을 넘는다. 나는 과감히 해외시장에 도전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무리 좋은 기술과 제품을 갖고 있더라도 판로가 없으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이놈의 빚을 어떻게 갚나? 앞으로 20년을 일해도 못갚을 산더미 같은 빚, 차라리 이럴 바엔 죽자."
1993년 6월 어느 날, 나는 자살을 결심하고 경기도 송추에 있는 아버님 산소로 갔다. 밤 11시께 동네 구멍가게에서 소주를 사들고 회한에 젖었다.
1989년 나는 전 재산을 털어넣어 내가 관리이사로 근무하던 한국슈어프로덕트사를 전격 인수했다. 당시 이 회사는 치아 신경치료제인 근관충전제 시장점유율이 40%에 달했지만 노사문제로 한국시장에서 철수해야 했다. 급기야 미국 경영자들은 회사를 폐쇄한 채 미국으로 도주해버렸다.
나는 이 회사의 제품과 브랜드, 마켓에 대한 비전을 확신했다. 나는 집을 팔고 친인척 돈을 모두 끌어모았다. 무려 126개 항에 대해 노조와 대타협을 했다. 회사는 그해 5월 다시 가동을 시작했지만 노조는 임금삭감에 맞서 연일 시위를 벌였다. 우리 아파트에 빨간색 페인트로 "미국놈의 앞잡이, 매국노 오석송은 한국을 떠나라"고 낙서를 하는가 하면 매일 꽹과리를 쳐댔다.
나는 노조에 회사 포기각서를 써주고 미국 시애틀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호텔에 머물며 LA에 거주하는 치과의사와 이 문제를 상의했다. 그는 대뜸 "내가 인수하죠"라며 공장 실사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에 와서 강경노조의 모습을 본 순간 바로 접어버렸다.
"이대로 무너질 순 없는 것 아닌가. 다시 시작하자." 그해 9월 나는 한국에서 했던 사업을 인도네시아에서 해볼 생각으로 출국했다. 그곳에서 현지 투자자를 만나 자본금 100만달러짜리 회사를 창업했다. 나는 형제와 동생, 이모, 고모 등 친인척을 설득해 35만달러를 투자했다. 제품 국산화의 원대한 꿈을 갖고 고려대에 국산 원료 개발도 의뢰했다. 하지만 시장은 `메이드 인 인도네시아(made in indonesia)` 제품에 신뢰를 보내주지 않았다. 결국 회사는 망했다.
산더미 같은 빚더미에 나는 탈출구로 죽음을 결심했던 것이다. 자살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아버님 산소 곁에서 술에 취해 잠들었다. 새벽 4시 무덤가에서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왜 여기에 왔지."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했다. "야~~" 절규하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죽을 용기가 있으면 죽을 각오로 한번 해보자." 순간적으로 기(氣)가 살아나는 것 같았다. 머리가 맑아지면서 자신감이 솟구쳤다. 털고 내려와서 고등학교(선린상고) 친구 7명의 친목모임에 찾아갔다.
"친구들아, 나 좀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줘라. 내가 자살을 결심했는데 도저히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친구들은 서로 맞보증을 서서 내게 5000만원의 종잣돈을 만들어줬다. 피눈물 같은 돈이었다. 돈을 받아든 나는 긍정의 최면을 걸었다. "너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정면으로 부딪치자." 1993년 9월 청주로 내려갔다. 이곳에서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60만원 하는 지하 60평짜리 공장을 임차했다.
아줌마 12명을 고용해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아이템, 치과재료인 근관충전제 생산에 매달렸다. 다행히 고려대에서 국산 원료 개발에 성공한 상태였다.
"해답은 글로벌이다. 자, 가자 세계로…."
나는 글로벌 보따리장수를 자처했다. 세관원의 눈치를 보며 가방 5개에 제품을 담아 전 세계 전시회를 쫓아다녔다. 돈이 되는 곳이라면 전 세계 어디든지 찾아다녔다. 2008년에는 출장거리만 무려 300만마일(지구 120바퀴)에 달했다. 올해 들어 여행한 거리만 5만마일, 지구 두 바퀴에 해당한다.
해외시장을 돌며 나는 제품 개발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그래서 99년 6월 연구소를 출범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김학용 전북대 섬유공학과 교수 등과 수술용 생분해성 봉합사 개발에 도전하기로 했다. 당시 회사 매출이 28억원이었는데 이 프로젝트는 무려 50억원이 드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무식한 게 용감한 것이다." 나는 엔젤투자를 받았다. 21억9000만원의 투자의향서가 들어왔는데, 정작 실제 자금은 1억9000만원 들어오는 데 그쳤다. 당시 회사는 월 3000만원 정도 수입이 생길 정도로 잘 돌아갔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야, 이 돈 가지고 편안하게 살지. 무모한 일을 시작하느냐"고 나를 타일렀다. 하지만 나는 일련의 일을 겪은 후 다소 뻔뻔함과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그래서 한국 대부분의 창투사나 은행을 쫓아다니며 자금지원을 받아냈다. 결국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수술용 봉합사 개발에 성공했다. 역시 제품이 나오기 전 나는 샘플을 들고 해외시장을 공략했다.
2003년 이라크전쟁이 발발하면서 세계적 의료기기 회사인 비브라운에 의료용실을 납품하게 됐다. 엄청난 행운이었다. 제품의 퀄리티를 비브라운 수준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후 지속적인 납품이 문제였다.
"가자, 중국으로."
중국시장을 핸들링하고 있는 홍콩바이어를 만났다. 그러나 공략이 쉽지 않았다. "관시로 해결하자." 나는 거래처를 집중 공략했다. 중국술 100병도 마다 않고 마셨다. 결국 그들은 마음의 문을 열고 납품을 받아주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지난해 우리 회사는 매출 234억원을 올렸다.
6월 말 우리 회사는 오송생명과학단지 시대를 연다. 혈관문합기, 인공뼈, 요실금 치료용 메시 등의 신소재로 더 큰 도약을 이뤄낼 것이다. 나는 사업을 하면서 "세상은 아무도 모르니 끝까지 버텨봐라. 좁은 로컬시장보다는 글로벌 시장에서 승부를 봐라"는 두 가지 가르침을 얻었다. 이 결과 우리 회사는 대기업과 경쟁하고 있고 96개국에 판매량 중 95%를 수출하는 회사로 성장했다.
2008년 4월 회사를 코스닥 시장에 상장했다. 나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메타바이오메드를 인류의 건강한 삶과 행복에 기여하는 바이오 의료 전문기업으로 육성해 나갈 것이다.
시련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의 CEO들에게도 나는 "절대 최악의 상황을 걱정마라. 열심히 도전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벌어진다"고 조언하고 싶다.
매일경제 2011.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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