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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窓)/-. 서글픈 歷史

장태완 장군, 정병주 장군, 김오랑 소령, 백영옥여사...그리고 이병호 여사

[김재동의 틱, 택, 톡]

12.12사태 희생자들의 30년 묵은 부음... 우린 정녕 치유되고 있는가

1979년 12월 12일자 소인이다.
우리는 지금 30년도 훨씬 전에 띄운 부고장을 이제야 받아들고 있다.

17일 오전 9시15분께 고(故)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의 부인 이병호(78)여사가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다.
2010년 7월 장 장군이 세상을 뜬지 1년 6개월여만이다.
이제 장장군의 가족이라곤 딸 장현리(50)씨와 사위 박용찬(51)씨만이 남았다.

경찰은 이여사가 평소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사실에 주목, 투신자살로 결론내렸다.
그리고 이여사를 죽음으로 내몬 우울증은 이미 1979년부터 뿌리를 내려 이여사를 갉아먹고 있었다.

12.12 군사쿠테타.
정권을 잡은 신군부측은 진압군을 이끌던 장태완 장군을 두고 볼 수 없었다.
패장으로서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고초를 당한 장태완 장군은 결국 강제전역 당했다.

장태완 장군이 끌려가던 모습이 TV를 탔나보다. 그 부친은 그 모습을 보곤 곡기를 끊고 막걸리만으로 울화를 죽이다 생을 달리했다. 1980년 4월이었다.
그 슬픔이 채 가시기전 서울대 자연계를 수석 입학했던 자랑스런 아들 성호(당시 20)씨가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경북 왜관 낙동강 근처의 산기슭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1982년 일이었다.
당시 경찰은 자살로 결론내렸다.

장태완 장군 내외의 부고는 이미 그때 씌여졌을 것이다.

또 다른 부고에 대한 기억이 있다.

1989년 3월 4일 토요일였다.
입사 갓 3개월 차인 견습기자는 낡은 녹음기를 거푸거푸 리와인드 해가며 라디오 뉴스를 모니터하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신문은 일요일자를 만들지 않았다. 스포츠신문만이 토요근무를 했을 것이다.
초판 마감이 2시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뉴스는 정오뉴스였을 것이고...
속보를 따라잡을 재간없는 스포츠 신문의 사회면은 그렇게 라디오뉴스를 모니터해 만들던 시절이었다.

낡은 라디오, 낡은 녹음기 특유의 노이즈 속에서 뉴스를 보도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흐릿했다.
"12.12 당시 특전사령관을 지낸 정병규(?)씨가..."
다시.
"12.12 당시 특전사령관을 지낸 정병규(?)씨가..."

그렇게 초판이 나갔다. 된통 깨졌다.
"견습 놈한테 시켜놨더니 정병주를 몰라서 정병규라 하지 않나..."
'저 12.12때 중3였거든요'란 가소로운 항변은 결코 목울대를 넘지 않았다.

데스크에 걷어차이다시피 달려간 송추유원지 부근 야산(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다),

정장군이 목을 맸다는 나무는 너무 가늘었다. 올가미를 건 가지 역시 높지 않았다. 시신만 서둘러 치운 탓인지 소주병은 남아있었다.(3개로 확인됐다.)

후속기사를 쓰며 마주친 사연.

그는 특전사령관였다.
12월13일 새벽 그를 쏜 것은 직계 부하인 박종규 중령의 3공수 병력이었다. 그는 부하가 쏜 총에 왼팔 관통상을 당했다. 이후 두차례 수술을 받아야했고 강제전역 당했으며 1988년 국회청문회에선 그 비열한 배신의 순간을 증언하려 애썼다.

그리고 노태우 대통령이 청와대 정원을 거니는 동안 이름 없는 야산에서 죽어갔다.

그날 새벽 총알은 그의 왼팔을 관통했지만 배신의 비수는 여지없이 그의 심장을 관통했을 것이다.

권총 한 자루로 사령관을 지키려다 죽은 군인도 있다.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육사 25기)이다. 김오랑 소령 역시 육사 1기 선배이자 관사 이웃인 박중령의 명령에 목숨을 잃었다. 당시 나이 35세.

그 부인 백영옥씨는 남편 죽음에 충격을 받아 이듬해인 80년 시신경 마비증세로 실명했다. 그도 결국 1991년 6월 경찰이 자살로 판정한 추락사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남편을 죽인 총성을 관사에서 듣던 그날 그 새벽, 이미 그녀의 인생도 끝장났음에 틀림없다.

몇 년 전 동작동 국립묘지 내의 한 절을 방문했다가 장군묘역에서 정병주장군의 묘를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다. 옛 생각에 가볍게 묵념하고 묘를 돌아봤다.
앞면에 '육군소장 정병주의 묘'라 적혀있고 뒷면엔 '一九八九년 三월 四일 경기도 고양군 산중에서 별세'라고만 적혀있었다. (감회가 남달라 자료를 찾아봤다.)
묘비기단의 까만 묘지석엔 단 한 글자도 적혀있지 않았다.
그가 느낀 유구무언의 참담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병호 여사의 부음.
80노인이다. 신이 부를 날을 기다릴 만도 한 나이다.
하지만 몸을 던졌다. 30년 전 어느 날 이미 아들과 함께 신의 품에 안겼기 때문인 듯 싶다.

30년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아픈 이들이 있다.
무덤덤해진 우리들도 있다.

그래서 우린 정녕 치유되고 있는건가?

 

 

머니투데이   201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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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더불어 만드는 세상 | 투명인간
원문 http://88jangsu.blog.me/138690343

 

2005년 MBC에서 방영되었던 "제5공화국" 8화 중 한 장면
장태완 장군의 군인다운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장포스"라고 불렀습니다.


장세동 : 여보세요.
장포스 : 야 장세동이 바꿔. 야! 장세동이 바꾸라니까!
장세동 : 장태완 수경사령관이십니다.

황영시 : 이리줘 내가 받을테니까.
어 장장군이야? 어 나 황영시야.
저 이리와서 나하고 얘기 좀 하자고.
장포스 : 아니 선배님은 왜 남의 부대에 와계십니까?
장세동이하고 김진영이는 내 직속부하들인데,
지금 거기서 그 놈의 자식들하고 무슨 작당을 하고 있습니까?!
내 들어보니 그 쪽에서 총장님을 납치했다카는데 
이게 사람이 할 짓이십니까?!
어떻게 총장님을 그렇게 하십니까?!
황영시 : 아니 장태완이 너 왜 이래? 다 알만 한 사람이
나하고 다 통할 수 있는 처지 아니야?
장포스 : 뭐가 통합니까! 지금 당장 총장님을 원상복구 시키세요!
황영시 : 아니 이거 너무 흥분해서 말이 잘 안 통하는데?

유학성 : 어, 이리 줘봐요.
장포스 : 여보세요? 야!!!
유학성 : 장장군? 나 유학성이야.
왜 흥분부터 하고 그래. 우리 얘길 들어보면
장장군이 충분히 이해할거야.
장포스 : 아니? 형님은 또 왜 거기서 그라고 계십니까?
거긴 내 부댑니다! 형님이 거기서 나오십시오!
그라고 형님이 나더러 총장님을 잘 모시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런! 형님이! 총장님을 납치했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더 말할 것 없습니다. 지금 당장 총장님을 원상복귀 시키세요!
유학성 : 장장군. 그럴 수는 없어.
이건 박대통령 시해사건 수사를 위해서 불가피한 일이야.
장포스 : 정말 이러깁니까?!
유학성 : 이봐! 정총장을 수사해보고 혐의가 없으면 풀어주면 될 거 아니가?
장포스 : 야 이 반란군 놈의 새끼야! 니들 거기 꼼짝말고 있어!
내가 지금 전차를 몰고 가서 니 놈들 머리통을 다 날려 버리겠어!
역적 놈의 새끼들!
유학성 : 장태완이가 전차로 우리를 날려버리겠다는데 어쩌지?




2010년 7월 26일 장태완 장군 별세.
대전 현충원 제2장군 묘역

12.12 쿠테타에 맞섰던 군인. 장태완 장군.

 

 

 

 

 


장태완 (1931 ~ 2010)

1950 대구상고 재학 중 6.25 전쟁 참전
육군 종합학교 11기 졸업 / 소위 임관
(* 필요한 장교를 빠른 시간 안에 양성하기 위해 1950년에 설치한 단기 군사 학교. 
두세 달 정도의 교육을 시킨 뒤 장교로부 임관시켰다.)
1971 준장 진급 (☆ → 장군)
1975 소장 진급 (☆) / 육군 26사단 사단장
1979 7대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1980 소장 예편 (*현역에서 예비역으로 편입)
1989 ~ 1995 한국증권전산 회장
1994 ~ 1997 제27대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
2001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2000 ~ 2004 제16대 민주당 국회의원

수상내역 및 저서
상훈 충무무공훈장
보국훈장 천수장
자랑스런 한국인상
12.12 쿠데타와 나』


12.12 쿠테타


1979년 10·26 사건으로 대통령 공석이 발생하자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에서 단일후보
99.6% 찬성으로 10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함동수사본부장 전두환 보완사령관>

10.26사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보안사령관 전두환(☆)
계엄사령관이었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 사이에
사건수사와 군인사문제(비정규 육사 출신인사 대거 중용)를 놓고 
여러 갈등이 있었습니다.
전두환 소속 군내 사조직 "하나회"가
전군부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정총장이 김제규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혐의를 내세우며
정총장을 강제 연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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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사태 주요 신군부세력

중장(☆)
유학성 - 군수차관보 정훈 1기
차규헌 - 수도군단장 육사8기
황영시 - 1군단장 육사 10기

소장(☆)
노태우 - 9사단장 육사 11기
박준병 - 20사단장 육사 12기

준장(☆)
백운택 - 71방위사단장 육사 11기
박희도 - 1공수여단장 육사 12기
최세창 - 3공수여단장 육사 13기
장기오 - 5공수여단장 육사 12기

대령 (***)
장세동 - 수경사 30단장 육사 16기
김진영 - 수경사 30단장 육사 17기
허화평 - 보안사 비서실장 육사 17기
허삼수 - 보안사 비서실장 육사 17기
이학봉 - 보안사 수사과장 육사 18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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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총장 연행에 저항할 수도 있을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윤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를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이 연희동 요정 연회 장소로 유인했습니다.
하지만 연회 도중 정총장의 연행사실이 전해지자
정병주,장태완 등의 육군장성들은 대응태세를 갖춰 
전두환과 맞서려 했으나,
전두환의 지시로 1공수여단장 박희도가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점령함으로써
육군지휘부를 무력화 시킨 후였습니다.


<제5공화국 핵심 인사들>

전두환 세력은 13일 새벽 전까지
 최규하 대통령 재가(*안건을 결재하여 허가)
받지 않은 상황에서 자체적 구테타를 일으켰습니다.
12.12구테타가 성공하면서
전두환 중심 신군부세력이 "제5공화국"의 핵심권력이 됩니다.
(신군부새력에 대응했던 정병주,장태완 등 장성급 군인은 좌천되거나 강제 예편되었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 집권시기엔 "12.12사태를 스스로 정당화"했었지만,
김영삼 정부 이후부터는 "하극상에 의한 구테타 사건"으로 규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