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3.1절을 맞아 숭고한 3.1독립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각종 행사들을 TV화면을 통해 보았다. 그러나 하루뿐의 각종 행사보다는 근본적으로 일제잔재의 청산과 친일행위자들에 대한 정리가 보다 시급하다고 본다.
요즘 KBS TV의 '한국의 유산'으로 1분여 방송되는 홍범도 장군의 경우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 봉오동전투의 영웅이기도 하지만 처자식들은 일제에 희생되고 홍범도장군도 꿈에도 그리던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해방되기 2년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렇듯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이억만리 타국에서 풍찬노숙하며 고난과 역경을 무릎쓰고 독립운동을 하고 국민들이 일제의 폭압에 신음하는 동안 일제에 협력하거나 아부하며 호의호식했던 인사들이 해방후에도 청산되지 않아 오히려 한국사회의 주류를 형성하여 오고 독립운동을 한 후손들은 집안이 거덜나거나 가난의 대물림으로 많은 고통속에 살아가고 있는 이상한 대한민국이 이제는 오랜 진통끝에 얼마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을 발행하여 여기에 이름이 올라 있는 인사를 이후에도 기리는 정말 이상한 나라이다.
엊그제 성북구 보문역인근에 갔다가 인촌로라는 도로간판을 보고 놀라움을 떠나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인촌 김성수가 어떤 인물이던가, 네이버 백과사전에서는 "1938년에는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이사 및 동(同) 연맹 산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이후에도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1940)· 총무위원(1943),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 결성 준비위원(1941), 조선임전보국단 감사(1941) 등으로 활동하면서 학병제· 징병제를 찬양하는 글을 쓰거나 강연했다 [출처] 김성수 [金性洙 ] | 네이버 백과사전" 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 아닌가.
인촌 김성수는 일제의 각종 정책에 동조하는 등 여러사유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는
인물이다.(촬영 : 2012년2월29일 지하철6호선 보문역 입구)
또한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들의 대부분이 변절하여 친일을 했건만 3.1절이면 친일에 대한 언급은 없이 이들을 기리고 아직도 신성한 대학캠퍼스는 물론 전국 곳곳에 친일행위자들의 동상들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당당히 서있는 상태에서 3.1절이든 광복절이든 각종 기념행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안타까움과 함께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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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민들은 반성해야 한다? '국가정상화 추진위원회'라는 단체에 따르자면 그렇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국가정체성을 수호'하겠다며 2008년 설립된 이 단체가 2010년 발표한 친북반국가행위인명사전(친북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에 박원순 서울시장의 이름도 버젓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친북인명사전>의 탄생에는 <오마이뉴스>도 한몫(?)했다. 2004년 1월 8일 <오마이뉴스>와 민족문제연구소가 손을 잡고 모금 활동을 벌인 결과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친북인명사전>은 바로 이 사전에 대한 대항마였다.
기자 역시 <친일인명사전>에 적으나마 힘을 보탰다. 어머니의 주도하에 온 가족이 성금을 냈다. 그리고 <친일인명사전> 발간 소식을 접한 얼마 후 민족문제연구소로부터 CD 1장이 집으로 배달됐다. 이번엔 아버지가 CD를 신청한 것이다. 그 속에는 <친일인명사전>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어떤 역경을 거쳐 왔는지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기록물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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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거짓과 불의 그리고 친일인명사전의 아버지 '임종국'
다큐는 이승만 전 대통령 이야기로 막을 올린다. 해방 이후, 그는 권력 의지에 불탔다. 미군정의 지지를 한몸에 받았으니 대통령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문제는 취약한 지지 기반.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김구와 독립운동 세력은 눈엣가시였다. 결국 이승만은 '돌이킬 수 없는 위험한 선택'을 한다. '청산'의 대상인 친일파와 손을 잡고 거꾸로 독립운동 세력을 '청산'해 나간 것이다. 1949년 6월 6일 친일청산기구인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같은 달 26일에는 김구 선생이 서거한다. 이 대목과 관련해 다큐멘터리는 이렇게 말한다.
"이로써 우리 역사는 거짓과 불의의 시대로 들어서고 친일 문제는 금기의 영역이 돼버립니다."
하지만 어둠이 있는 곳엔 빛이 새어 들어오기 마련이다. 다큐멘터리는 여기서 재야사학자 임종국 선생을 소개한다. 그는 반평생을 바쳐 1만2000장의 친일인명카드를 만든다. 그속에 자신의 친아버지까지 담겨 있을 정도로 그는 엄격한 잣대를 댔다. "어둠의 시대에 금기를 깨고 밝은 빛"을 찾던 그는 1988년 CBS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기고 1년 뒤인 1989년 폐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친일파를 처벌하지도 못했고, 그 사람들이 날뛰는 꼴을 그대로 봐 놓았고, 친일파에 대한 단죄가 없는 상태가 돼 버린 그 세대로서 자손들한테 민족정기다, 애국해라, 무슨 얼굴 가지고 그 얘기를 하겠어요?"
그가 마지막으로 주고 간 선물이었을까? 천안 요산재에 차려진 그의 빈소에서 '반민족문제연구소'의 불씨가 지펴진다. 연구소 설립의 주축이었던 시민 활동가와 연구자들은 마침내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결심한다.
편찬 작업을 시작한 민족문제연구소...시민들이 화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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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쉽지 않았다. 1994년 '민족문제연구소'로 이름을 바꾸고 공식 편찬 작업을 시작했지만 국민들의 관심은 저조했다. 거기다 1997년 외환위기까지 터지면서 사업은 더욱 버거워졌다. 좁은 사무실을 꾸려나가는 것도 힘에 부쳤다.
외환위기의 먹구름이 조금씩 걷혀가던 1999년 사업이 재개되었다. 하지만 국민의 무관심으로 외면당했던 기존의 방식을 벗어나야 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대학교수'를 대상으로 한 서명 운동이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두 달 반 동안 267개 대학, 1만 명 이상의 교수들이 서명했다. 덩달아 대중들의 관심도 점차 커져 갔다.
친일인사 '기념사업'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온 것도 이 즈음이었다. 특히 세간의 관심은 '박정희 기념관'에 집중되었고 이에 대한 논쟁도 치열했다. 이런 상황에서 친일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도 자연스레 높아졌다.
그동안 침묵하던 공중파 언론사들도 '제2의 반민특위'라며 친일인명사전 편찬 사업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사업 추진을 위한 재단이 설립되었고, 국회에서는 예산지원 안이 통과되었다. '친일인명사전 호'가 처음으로 순풍을 만나 항해를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순풍도 잠시 암초가 등장했다. 해방 이후 수십 년간 친일문제에 대한 언급조차 '금기'로 만들어 온 조·중·동 등 보수언론과 '친일'을 정치경제적 뿌리로 둔 보수 세력들이 본격적인 반격에 나선 것이다.
대한민국의 입법부와 행정부는 이들의 주장을 충실히 대변했다. 2003년 12월 29일 대한민국 16대 국회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책정된 예산 5억 원을 모두 삭감했다. 또 2004년 1월 7일 법사위 법안심사소위 위원장 김용균 한나라당 의원은 '친일진상규명법' 심사를 거부했다.
시민들은 분노했다. 당시 교사로 근무하던 김호룡씨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뉴스를 듣고 흥분한 그에게 아내가 말했다.
"흥분하지 말고 대안을 찾아야 할 것 아니냐."
김호룡씨는 모금을 제안하는 글을 <오마이뉴스>에 올리는 것으로 화답한다.
반응은 뜨거웠다. 하루 사이에 4000만 원이 모였다. 그런데 행정자치부가 '불법모금' 선언을 하면서 자발적인 모금 운동에 훼방을 놓았다. 하지만 이들의 행태는 시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고, 모금 열기는 더욱 거세게 불타올랐다. 그리고 열하루 만에 목표치 5억이 모였다.
박지만의 마지막 저항을 뚫고 세상에 나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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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사전 편찬 작업은 본 궤도에 올랐고 연구는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2004년 2월 11일 사전에 들어갈 인물을 선정하기 시작했다. 2005년 8월에는 사전편찬 자문회의를 열어 학계를 중심으로 원로들의 자문을 구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29일 경술국치일에 사전 수록 예정자 1차 명단을 공개했다. 총 3090명이었다.
보수 언론은 거센 비난을 쏟아냈고 연구소를 빨갱이 집단으로 몰아붙이는 시위대가 민족문제연구소 앞을 점거했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을 막을 순 없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2008년 4월 29일 최종 수록대상자 4776명의 명단이 발표됐다. 파장은 예상보다 컸다. 2009년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를 비롯한 유족들이 게재금지가처분소송을 냈다. 법원은 친일인명사전의 손을 들어줬고, 발간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2009년 11월 8일 새벽에는 비가 내렸다.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열릴 날이었다. 시간이 가고 해가 뜨자 거짓말처럼 날이 개었다. 마치 하늘이 <친일인명사전>을 반기는 듯했다. 하지만 지상에선 그러지 못했다. 대관이 갑자기 취소되었고 급히 장소를 옮겨야 했다. 이것이 대한민국 주류 세력이 <친일인명사전>에 건넨 첫 인사였다.
장소는 백범 김구 묘소로 옮겨진다. 사람들은 "차라리 잘 됐다, 대관이 취소된 건 김구 선생님이 우리를 부른 것"이라며 발걸음을 뗐다. 그리고 백범 김구 영전에 사전 세 권을 바치며 다큐멘터리는 막을 내린다.
끝나지 않은 역사 바로세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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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는 끝났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친일인명사전>이 나오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친일 청산과 역사바로세우기는 이제 막 첫 단추를 꿰었을 뿐이다. 사전 하나로 친일이 청산될 리 없기 때문이다. 시민들 특히 청년들의 관심과 참여가 필요한 이유다.
문제는 <친일인명사전>을 끝까지 압살하려 했던 세력이다. 이들은 여전히 한국사회의 주류를 자처하며 군림하고 있고 지난 대선을 앞두고 '뉴라이트'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왜곡하는데 서슴없이 나서기도 했다. 끊임없이 진실을 호도하고 논점을 흐리며 역사바로세우기를 훼손하고 생채기를 내고 있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CD를 넣으려고 하는데 종이 한 장이 떨어져 나왔다. 글이 쓰여 있었다. '그날의 '당신'을 찾습니다.' 모금 당시 힘을 모아 준 시민들에게 감사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내겐 '당신'을 찾는다는 제목만이 '쿵' 하고 다가왔다. 그리고 혼자서 되뇌었다. 그때 그 뜨거웠던 '당신'은 어디 있냐고. 역사는 아직도 바로 서지 못했는데, 당신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느냐고. 나는 지금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리고 이 물음은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이냐고."
오마이뉴스 2012.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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