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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Life(삶)/-. 성공경영

화천산천어축제의 정갑철 전 화천군수


대한민국의 겨울철 대표적 축제이며 세계적인 축제로 발전하고 있는 "화천산천어축제"에 대한 궁금증으로 인터넷검색을 하다 발견하고 읽어 보게 되었네요.

공직자의 자세와 함께 말미의 "‘수기초심 시종불변(守基初心 始終不變)’의 글과 이소성대(以小成大)라는 좌우명을 담은 족자를 머리맡에 두고 자기 전에 한 번씩 읽어보면서 하루 일과를 반성하고 있다"는 구절 또한 감동적이네요


아래 내용은 A플러스 성공자치 연구소 정문섭 소장의 저서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자치단체 CEO』중 2010년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3선 군수로 당선된 정갑철 화천군수편을 저자의 허락에 의해 올린 글임을 밝힙니다. 

 


정갑철 화천군수



 

자신감을 심어준 산수경시대회


 나는 해방 전 세대다. 1945년 1월 5일에 태어났고, 그해 8월 15일에 광복이 되었으니 말이다. 1900년대 우리나라는 굶주림과 가난 속에서 허덕였다. 나 또한 광복 후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원주시로 되었지만 내가 태어난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산현리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나는 횡성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화천군으로 이사한 뒤에는 화천군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조금 창피한 이야기이지만 4학년 때까지 구구단을 제대로 외우지 못했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손바닥도 많이 맞았다.

 5학년을 마칠 무렵 시군 교육청에서 시행하는 산수경시대회가 열렸다. 그런데 4학년까지 구구단을 외지 못했던 내가 횡성군 초등학교 전체가 참여한 대회에 나가서 장려상을 탔다.

 장려상이라고 해봐야 4등 정도이니 상품은 고작 작은 노트 10권을 탔을 뿐이다. 그래도  이는 내게 기적 같은일이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다 떨어지고 나만 상을 탔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골치 아픈 녀석이라고 선생님들도 혀를 내둘렀던 내가 공부를 잘 해서 상을 타는 순간 얼마나 희열을 느꼈던지, ‘나 같은 놈도 하면 되는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때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6학년 때에는 학교장상도 받았다.

 내게는 한양공대에 다니던 외삼촌이 계셨다. 아버지는 외삼촌에게 “한양공대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보셨다. “먼저 한양공고를 보내야한다”는 외삼촌의 답변에 한양공고는 사립학교여서 학비가 많이 든다는 것을 아신 아버지는 나를 공립인 성동공고로 보냈다.

 공대에 가려고 공고에 간 것인데 막상 공고에서 대학에 가기란 더 힘들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서울에서 하숙을 하며 1, 2학년까지 성동공고를 다녔다. 그러다가 가세(家勢)가 기우는 바람에 더 이상 학비를 지원받을 수 없어서 3학년 2학기 때 자퇴했다.

 그래서 내 학력은 고3 자퇴가 전부다. 돈이 없어서 그만둔 것이다. 친구들 중에는 구두를 닦으면서 고학하던 친구들도 있었는데 나는 그 시절 부모 탓만 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한없이 철부지였던 시절이었다.

 고향에 와서는 별짓을 다 해 봤다. 산도 타보고 평화의 댐 근처인 해산에 가서 사냥도 해보았다. 그러다 입대하려고 병무청에 갔더니 군대에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공군시험이 있었다. 춘천고등학교에서 120명이 공군입대 시험을 치렀다.

 머리를 깎고 와서 보니까 강릉과 철원 등지에서 모두 일곱 명이 합격했다. 선발된 사람들은 월남에 안 가려고자원한 연·고대와 서울대 농대에 다니던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군대생활을 40개월을 했다. 꼬박 3년을 채우고도 모자라 북한의 김신조 무장공비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4개월을 더 복무한 뒤 대구에서 제대했다. 


공무원으로서 첫발을 내딛다.


 제대는 했으나 학력이 중졸이어서 취직이 어려웠다. 그렇게 6~7개월을 허송세월하면서도  고등학교 졸업장을 다시 따거나 검정고시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재래시장의 경비원을 하게 되었다. 그때는 야간통행금지가 있어서 시장경비를 야간에만 세웠다. 그런데 울산 동해화력발전소 건설회사에 다니는 고등학교 때 친구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발전소 공사장에 오면 일거리가 많으니 할 일이 없으면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공무원을 하고 있던 다른 친구 하나가 책을 한 권 사주면서 “시험에 떨어지면 가고, 합격하면 공무원을 하다가 그래도 싫으면 그때 가라”면서 울산행을 말렸다.

당시 공무원 시험을 보려면 그가 사준 책만 열심히 읽어도 합격을 할 수 있었다. 시험은 15일밖에 남지않았다. 고등학교 때 배운 국어, 영어, 수학을 제외하고 배운 적이 없는 법제대의와 경제대의만 밤낮으로 공부한 뒤 시험장으로 갔다.

 다른 과목들은 그럴듯하게 봤고 경제대의 과목은 다 맞은 것 같았다. 수학은 20문제 가운데 12문제 이상을 맞아야 하는데 동생에게 물어보니까 체크한 것이 다 틀린 것 같았다.

 군청게시판에 합격자 명단을 붙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창피해서 확인을 못하고 있었는데 공무원 친구가 나의 합격 사실을 알려주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컴컴한 밤중에 뒤늦게 군청으로 찾아갔다. 정말로 내 이름이 합격자 명단에 있었다.

 군 복무를 마친 덕분에 가산점이 5점이나 붙어 성적은 최고 점수였다. 70년 8월 화천군으로 발령을 받아 화천읍사무소에서 5급 을류(지금의 9급) 공무원으로 첫 공직생활을 시작했고, 16년이 지난 86년 10월 철원에서 근무할 때 ‘공무원의 꽃’이라는 사무관으로 승진했다.

 그 뒤 1년 정도 지났을 때 강원도에서 “도청으로 전입할 의사가 없느냐?”고 하기에 “서울엔 가도 강원도에는 안 간다. 학연도 혈연도 지연도 없는데 경쟁이 되겠냐?”면서 거절했다.

 그러자 친구 형이 내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다른 사람들은 도에 가려고 안달인데갑철이 그 녀석은 오라고 해도 안 가는웃기는 녀석.”이라고 핀잔을 주는 것이었다.

 유능한 공무원을 발탁한다는 사실을 알고 도청 근무를 자원했다. 그 바람에 나는 유능하지도 못하면서 군청 사무관이 도(道)로 진입한 공무원이 된 셈이 됐다.

 도에 입성하자 도청 직원들도 내 능력이 대단한 줄로 착각을 했다. 도에는 6급 공무원부터 사무관까지 경쟁자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내가 도에서 받은 첫 인상은인간미가 없는곳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정(情)도 없었고, 언제나 지나친경쟁의식 속에 묻혀 살았다.

 오기가 발동한 나도 “너희들이 알면 얼마나 알겠느냐, 한 번 붙어보자.”며 야생마와 같은  당찬 기질을 발휘하여 더욱 더 노력했다. 

 서기관으로 승진한 뒤에는 탄광지역개발과장과 총무과장도 맡아서 하게 됐다. 총무과장은 승진이 보장된 자리다. 처음에 총무과장으로 발령이 나자 주위에서는 “6개월도 못 버틸 것”이라고 험담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무려 2년 반 가량 총무과장으로 근무하면서 6개월에 한 번꼴로 대통령을 모시는 VIP 행사도 무난히 치렀다. 덕분에 도에 들어간 지 14년 만에 내 고향 화천의 부군수로 영전되어 금의환향할 수 있었다.


신세를 졌으면 감사할 줄도 알아야


도청에서 체육시설계장을 담당하고 있을 때였다. ‘보광 휘닉스파크’와 ‘현대 성우리조트’가 동시에 골프장과 스키장 개설을 허가해 달라는 서류를 제출했다.

 휴양과 레저를 겸한 시설들이 들어온다면 강원도지사가 기치로 내건 관광산업이 도약할 기회가 마련된다.

 이들 대기업들이 들어올 경우 무엇보다도 강원지역 발전의 전기가 마련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직원 4명과 밤을 새워가며 서류를 검토해서 허가 신청을 승인해주었다.

 95년 12월 현대 성우리조트에 대한 준공검사를 내주고 3개월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3.1절에 현대 성우리조트에 놀러왔던 사람이 술을 마시고 스키를 타다가 인공섬 지주를 들이받고 숨지는 인명사고가 발생했다.

 그 바람에 담당부서관리 소홀사람이 숨졌다며 경찰에 불려가 한 달이 넘도록 조사를 받게 되었다. 준공검사를 너무 빨리 내주어서 인명사고가 났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놀러온 사람이 숨진 차도 코스는 업체의 임의사항이지 허가사항도 아니었다. 

 3월말까지 경찰서에서 자그마치 1,700페이지 분량에 달하는 서류가 나올 만큼 장기간 조사를 받았고, 4월 1일 나에 대해 허위공문서 작성 혐의로 구속영장이 신청됐다.

 다행히 영장심사를 맡은 판사가 구속영장을 기각시키는 바람에 풀려날 수 있었는데 그때  영장을 기각시켜준 판사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고백하건대 그 당시 준공검사와 관련해서 외부의 압력이나 청탁은 한 건도 없었다. 오로지 지역발전을 위한 순수한 마음에서 한 일이어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울 게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판사가 검사의 손을 들어주었다면 나는 구속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에 구속영장이 발부됐다면 아무리 떳떳하다고 주장한들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당시 검사는 어떻게든구속시켜야 하는 입장이었고, 피의자 신분이었던 나로서는 판사의 현명한 판결 말고는 달리 호소할 방법도 없었다.

 결국은 판사의 올바른 판결이 인생의 꼬인 매듭을 풀어주었고, 덕분에 이듬해인 97년 7월 나는 도청 서기관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그 뒤에 나는 영장을 기각시켜 준 판사를 찾아가서 감사의 뜻을 전달했어야 했다. 그러나 사람이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맘이 다르다는 말처럼 바쁜 공무원 생활을 핑계로 자꾸만 잊어버렸다.

 언뜻 생각이 났다가도 이를 실천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로부터 12년이 흐른 2008년 8월 어느 날 화천군수가 되어서 법원 근처를 지나다가 그때 그 판사 생각이 났다.

 ‘인간의 도리 상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곧바로 비서실장에게 연락하여 1996년 3월부터 8월 사이 원주지법에 근무했던 판사의 명단을 학인하고 법조계에 판사의 향방을 수소문했다.

 그 결과 고마운 판사는 000 판사로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로 근무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화천특산품인 토마토를 들고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그때의 판결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묘했던 것은 그 분은 그동안 행적을 지켜본데다 화천군수로 일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너무 늦게 찾아왔다는 자책감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래도 잘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가 화천군수가 되어 나타나자 고마움과 동시에 보람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면서도 온통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사실상 법률적 판단은 그가 알아서 한 것이고 나 역시 죄가 없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고마움을 느꼈다면 제때 표시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던 나의 행동이 너무도 민망스러웠다.

 그러나 부장판사님을 만나고 온 뒤로 마음속에 있던 응어리가 풀어지면서 후련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나를 위해, 화천군을 위해 던진 출사표


 6.25때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한 미군병사가 ‘여동생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지키기 위해, 정원의 떡갈나무를 관리보전하기 위해 참전했다’라고 쓴 글을 고등학교 영어교과서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나라 공무원들은 공직에 발을 처음 들여놓으면 국가에 충성하겠다는 공무원의 신조나 윤리강령을 낭독한다. 그러나 국가에 충성하겠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내는 명분상의 포장일 뿐 실제는 내가 잘 먹고 잘살기 위해 공무원을 하는 것이다. 

 외국인들은 이처럼 가족을 위해, 아내를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는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나 역시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87년 사무관이 되어 강원도 도청으로 입성했을 때 내 눈에 비친 도청은사람들은 경쟁만 하다 보니 몰(沒) 인간화되어 있었고, 학연, 지연, 혈연이 판치는 연(緣)의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내가 도의 총무과장을 했다는 자체가 불가사의 했고 신기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면서 나도 이제는 내 고향 화천을 위해 인재를 육성하고 경쟁력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2001년 화천부군수로 부임하면서 나는 고향 화천군의 정체성을 찾으며 경쟁력을 키울 방법, 그리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할 방법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밖에서 겪은 어려웠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지정학적으로 접경지역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화천군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런 상황에서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지역을 발전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면서 나를 위해, 그리고 화천군민을 위해 민선군수에 출마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다행히 민주당 소속이었던 현직 군수도 퇴임하기 전에 “당신이 군수에 나갈지 안 나갈지 모르겠으나 나는 다음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며 미리 입장정리를 해주었다.

 3선 출마를 해도 되는 현직 군수가 차기 출마를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힘에 따라 2002년 3월 부군수직의 사표를 내고 민선군수에 도전장을 던짐으로써 화천군수에 당선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화천군은 86%가 산이고, 5%가 물이다. 활용이 가능한 땅이라고 해봐야 9%가 전부다. 인구도 6만 명 가운데 3만 6천여 명은 군인이고, 민간인은 2만 4천명에 불과하다.

 군인이 인구의 60%를 차지한다는 것은 화천군 경제에서 군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높음을 뜻한다. 결국은 군인이 주 관광객이며, 이를 좀 더 심하게 표현하면 40%의 민간인이 60%의 군인에 기대어 사는 경제구조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화천군의 산업구조는 1차 산업 33%, 2차 산업 1~2%, 나머지 65%가 3차 산업이다. 그렇다면 3차 산업에 해당되는 관광지 인프라가 구축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아무 것도 내세울 게 없었다.

 60~70년대 빈곤하던 시절부터 화천군민들은 군인들이 고향에서 가져오는 용돈에 기대어 먹고 살아왔던 것이다.

 이처럼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사는 구조로 살다보니 군민들은 저축 개념도 희박했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그런 상황은 70년대 이후까지도 한동안 지속되었다.



산천어 축제를 시작하다


 나는 군수에 당선된 뒤 지역발전을 위해 관광기반 시설을 구축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화천의 세 가지 자원인 산과 물, 그리고 청정성(淸靜性)을 가지고 빈곤을 타개해나갈 방법과 가능성 등을 여러 가지로 저울질했다.

 이 가운데에서도 청정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자원이지만 활용가치가 비교적 높을 것 같았다. 그때 화천군은 화천의 옛 이름을 따서 지은 ‘낭천(狼川)얼음축제’를 1999년부터 2002년까지 3년째 열고 있었다.

 그러나 그저 얼음판에서 빙어낚시를 하는 정도의 축제일 뿐 지역민들의 동네잔치라는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고향발전을 위한 여론도 수집했다. 빙어낚시 말고 색다른것이 없을까 고민하는 사이에 겨울에 산천어라는 어종(魚種)으로 낚시대회를 열면 청정 화천을 알리는데 제격이라는 아이디어를 듣게 되었다.

 연어과에 속하는 물고기인 산천어는 물이 맑고 수온이 연중 20℃ 이하인 계류에서 서식하는 냉수성 어종으로 특유의 점무늬인 파 마크(Parr mark)가 아름다워 ‘계곡의 여왕’이라 불린다.

 송어의 변형종인 산천어는 또한 1급수에서만 살기 때문에 화천의 청정성을 알리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산천어의 명칭은 화천과 어감이 비슷해 마치 화천을 위해 태어난 물고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막상 산천어축제를 하겠다고 하자 산천어를 기르는 양식업자들도 “산천어 얼음낚시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걱정을 하는 눈치였다.

 안되겠다는 생각에 산천어 얼음낚시를 직접 실험해보기로 했다. 얼음물 속에 산천어를 넣고 구멍을 뚫은 다음 찌를 드리우고 기다렸다. 그런데 불과 몇 분 사이에 찌가 흔들리면서 산천어가 미끼를 덥석 무는 것이었다. 빙어낚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짜릿한 손맛이 일품이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낭천 얼음축제를 하는 3년 동안 별 재미를 못 느꼈던 터라 산천어 축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역에 살지도 않는 산천어를 가지고 와서 왜 난리법석을 피우느냐?” 며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얼음낚시 축제를 하려면 낚시가게의 도움이 있어야 하고, 고기를 잡으면 회를 뜰 사람도 있어야 한다. 또한 축제에 참가한 낚시꾼들의 식사문제도 해결해 주어야 하는데 누구 하나 선뜻 나서서 자발적으로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이 없었다.

 화천읍에는 낚시점이 네 개 밖에 없었는데 도와달라고 하자 서로 떠밀기만 했고, 축제장에 나와서 식당을 운영해 달라는 요청에도 나서는 음식점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적십자봉사단 협의회장에게 소머리고기를 사주고 “적자가 나면 소머리고기 값은 안 줘도 좋다”면서 축제기간 동안 음식점을 운영해 달라고 부탁했다. 적십자 봉사단원들의 협조를 받아 가마솥을 걸어놓고 설렁탕과 곰탕을 끓이기로 하는 등 기본적인 준비를 모두 마쳤다.

 화천천은 해마다 12월 중순이 되면 양옆의 골짜기에서 골바람이 세차게 불어 닥치기 때문에 시내보다 2℃나 온도가 낮아서 얼음도 빨리 언다. 그래서 축제가 시작될 1월초 무렵이 되면 얼음이 40cm로 두꺼워진다.

 축제일이 임박해지면서 외지인들에게 축제를 알리기 위한 홍보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산천어 축제는 새해 해맞이행사를 제외하고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저 열리는 겨울축제다.

 2003년 1월 2일 제1회 산천어축제가 시작됐을 때 처음에는 호응이 없는 듯했다. 그러나 첫 주말인 1월 4일 토요일이 되면서 관광객들이 한꺼번에 밀려들더니 나중에는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방문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에 앞서 나는 화천군 나라축제조직위원회 측에 “산천어축제에 외지 관광객들이 2만 명 이상만 와도 술 한 잔을 멋지게 사주겠다.”고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불과 하루 이틀 사이에 방문객 수가 2만 명을 넘어버리자 일이 밀려 술을 사줄 사람도 얻어먹을 사람도 축제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2주일이 넘으면서 방문객은 순식간에 10만 명을 넘어섰다. 파리만 날렸던 낚시점들은 몇 년 동안 쌓였던 견지낚시의 재고가 한꺼번에 동이 나자 “더 이상 팔 물건이 없다”며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식당운영을 맡았던 적십자봉사단은 준비했던 사태고기와 양지머리고기가 바닥이 나자 그 뒤부터는 부실한 설렁탕을 내놓는 바람에 ‘한우도강탕(韓牛渡江湯, 한우가 강을 건넌 부실한 설렁탕이라는 뜻)’ 소리까지 들었다.

 축제장에서 관광객들이 잡은 산천어를 회로 떠주던 사람도 나중에는 얼마나 회를 떴는지 “돈이고 뭐고 사람이 망가지겠다.”면서 하소연했다.   

 당초 9일 일정으로 잡았던 축제가 밀려오는 방문객들 때문에 계속 연장을 하면서도 성황리에 끝나자 축제를 준비했던 관계자들은 물론 화천군민들도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산천어 축제의 첫 해 인파는 화천군이 생긴 이래 가장 많은 22만 명이 왔다간 것으로 집계됐다. 강원도의 최북단에서 군인들만 보고 살아온 화천사람들에게 이처럼 많은 방문객들이 왔다갔다는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는 경험이었다.


 

산천어축제 인프라를 구축하라


2003년 1월 2일 제1회 산천어축제를 열었을 때 조직위와 일부 봉사단체, 공무원 외에는 협조해주는 군민들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역축제의 한계를 넘어 관광객이 22만 명이나 다녀가자 화천군민들은 깜짝 놀랐다.

 이듬해인 2004년 2회 축제에는 참가자가 58만 명으로 첫해에 비해 무려 2배가 넘게 늘어나자 산천어축제를 대하는 화천사람들의 마음자세도 크게 달라졌다.

 그러나 관광객들은 산천어 축제 현장에만 있다가 갈 뿐 읍내에는 별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 결과 축제장에서 영업한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되었지만 읍내 상인들은 불만도 적지 않았다.

 2004년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화천군 재경군민회 행사를 개최했더니 과거에는 200여 명을 넘지 않던 출향인사들이 500여 명이 넘게 참석해 군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2005년 3회 축제 때에는 관광객이 70만 명을 넘어섰고, 2006년 4회째 축제부터는 관광객 수가 마침내 100만 명을 돌파했다.

 이때부터는 행정안전부의 자금 지원을 받아 축제장에서 읍내로 연결되는 지하통로를 뚫었더니 화천 읍내에도 명동보다 더 많은 인파가 붐비기 시작했다.

 화천읍내의 경제 활성화에는 성공했지만 다른 면에까지는 확대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체계적인 인프라 구축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렇게 해서 시작한 것이 ‘사랑방마실’의 운영과 화천사랑상품권 도입이었다. 이 가운데사랑방마실 운영은 산천어축제장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산촌마을 민가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마을 사람들과 시골의 정취를 느끼게 하자는 취지에서 마련했다.

 이는 축제기간 동안 찾아온 관광객들을 읍면으로 분산시켜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것인데 첫 해에는 6만 명의 관광객들이 이를 이용했을 정도로 평이 좋았다.

 축제기간 동안 입장권이나 예치금, 상금 형태로 내준 지역화폐인 화천사랑상품권도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한몫했다.

 이에 힘입어 화천군은 지역에 풍부한 나무자원을 활용하여 찜질방을 만들어 가족들이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과 시골마을의 사랑방 문화를 충분히 살린 차별화된 인프라를 구축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산천어축제는 정부로부터 예비축제와 유망축제, 우수축제로 지정받으면서(2010년 최우수 축제로 지정) 산천어 산업을 육성하는데 필요한 30억 원의 예산을 지원받았다. 이에 따라 올해부터는 2년 동안 산천어 관련 산업을 30억 원을 들여 육성할 수 있게 되었다.

 산천어축제가 열리면 화천군청 공무원들은 휴일을 8일씩이나 반납하고 축제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 물론 축제가 끝나고 나면 2박3일간의 휴가를 준다.

 공무원들도 사람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있는데 공복(公僕)이라는 이유로 봉사만을 요구해 미안한 마음이 들 때가 많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산천어 축제를 계기로 화천군 전체가 산천어로 브랜드화가 되면서 화천지역에도 농외소득이 창출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1백만 명을 넘어선 산천어축제의 성공비결

 

 지방자치단체들은 어디든 다 축제를 연다. 그러나 대부분 축제들은 피서 철인 여름과 수확의 계절인 가을철에 몰려 있기 때문에 겨울철에 이루어지는 축제는 그다지 많지 않다.

 유일하게 연초에 시작하는 축제는 산천어축제를 비롯해 강원도 인근 시군에서 이루어지는 빙어축제, 눈꽃축제 뿐이다.

 산천어축제가 언론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이런 계절적 배경도 있다. 60만 명의 인파가 몰려든다는 인제의 빙어축제, 대관령 눈꽃축제, 태백산 눈 축제들이 유명세를 탈 때에도 화천의 산천어축제는 사실상 축제 축에도 끼지 못하고 있었다.

 2003년 겨울에도 대부분의 방송사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유명축제에 맞춰서 특집방송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날씨가 따뜻해 눈이 오지 않았고, 인제 소양호에는 얼음도 얼지 않았다.

 그러자 특집방송에 차질을 빚은 방송사들은 장소를 화천군으로 옮겨 다급하게 실황중계방송에 나섰는데 이것이 얼마나 폭발적인 홍보효과를 가져왔는지는 뒤늦게 알게 되었다.

 금요일에 산천어축제가 방송에 소개된 뒤로 주말부터 화천지역에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는데 얼마나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는지 무선기지국이 용량의 한계를 넘어서는 바람에 휴대폰이 불통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화천군은 그 뒤로 산천어축제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2006년부터는 서울 관광공사 등에 가서 길바닥에 연못을 만들어놓고 맨손으로 산천어를 잡는 시범까지 보여주었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외신기자들이 맨손으로 산천어를 잡는 축제를 세계에 알렸고, CNN을 비롯하여 독일, 캐나다 방송은 물론, 올해는 UPI까지도 집중적으로 방영을 하면서 30여 개의 외신을 포함하여 80여개 방송사에서 산천어축제를 홍보해주었다.

 산천어축제가 이처럼 언론의 집중적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연초에 여는 축제가 연초부터 특집거리를 찾아나서는 언론사의 속성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이후로 산천어축제는 화천의 청정한 자연환경과 산천어라는 새로운 아이템, 민간차원의 ‘화천군나라축제조직위원회’의 운영과 화천군의 전폭적인 행정지원, 지역상품권 발행, 눈꽃열차 개발, 사랑방마실 운영 등 해마다 새로운 인프라를 구축하면서 양과 질 모든 면에서 진화된 축제로 거듭 성장ㆍ발전해 왔다.

 지역축제는 지역 여건과 인문ㆍ자연 환경에 따라, 그리고 콘셉트를 어디에 맞추고, 공략 대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성공 여부가 판가름이 나게 되어 있다.

 산천어축제는 아직은 완벽하게 성공한 축제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사람들을 모으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자부한다. 앞으로도 어린이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그네들에게 즐거움을 어떻게 선사할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산천어축제는 해를 거듭할수록 함평의 나비축제, 보령의 머드축제와 함께 성공한 축제라 평가받으며 브랜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럼에도 2006년부터 줄곧 기후변화를 걱정하는 것은 ‘얼음’이라는 자연적 도움이 없이는 산천어축제가 불가능하며, 이제는 축제장에 얼음이 얼기를 하늘에만 빌 게 아니라 대안을 세워야 할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특히 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라고 하는,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한계적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산천어축제의 지속적인 성공은 보장받을 수 없다.

 산천어축제도 흥행의 주기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언제 위기가 닥칠 것이고, 위기가 왔을 때 이를 어떻게 새로운 기회로 반전시킬 지에 대한 치밀한 준비가 지금부터 마련되어야 한다.



 

아시아의 3대 겨울축제로


 관광객이 100만 명을 넘어서면서 산천어축제도 중국 하얼빈 빙등축제, 일본 삿포로 눈축제와 더불어 아시아 3대 겨울축제로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동북아에서 100만 명이 넘는 축제들끼리 정보를 서로 공유하고 협의를 통해 발전을 모색하자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산천어축제기간 동안 이에 공감하는 중국 하얼빈, 일본 삿포로, 한국 화천 산천어축제 주최자들이 함께 심포지엄도 개최했다.

 겨울 기간이 같은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가 힘을 모아 특색 있는 축제를 동시에 연출한다면 훨씬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는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지난 축제부터는 호응이 좋았던 중국 하얼빈 빙등축제와 일본 삿포로 눈축제 관련 전시물을 읍 시가지 일대에서도 볼 수 있게 했다. 새로 조성된 물레방아 공원에는 화천군이 지난해 가입한 세계 겨울도시들의 우정의 광장도 개설했다.

 시가지로 진출한 이 축제들은 어떤 형태로든 진화하고 발전을 거듭할 것이다. 따라서 산천어축제가 체계적인 인프라를 갖춰나가리라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올해로 3회째 열린 심포지엄에는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 몽골, 핀란드 등 5개국이 참여했으며, 축제에 참여하는 외국인 숫자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3년 전에는 외신기자클럽을 초청해서 산천어축제를 홍보한 덕분에 미국의 주간지《타임》에까지도 산천어축제가 크게 보도된 적이 있다. 지난해는 미8군 사령관을 역임했던 벨 장군이 산천어낚시를 즐기고 갔다.

 산천어낚시에 참가하기 위해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등 동남아시아권에 있는 낚시 마니아들의 방문도 줄을 잇고 있어서 내년부터는 구간별로 통역 안내원을 두는 문제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이처럼 산천어축제가 중국 하얼빈 빙등축제, 일본 삿포로 눈 축제가 공동 참여하는 단계를 지나 세계겨울도시협의회 회원국가가 모두 참여하는 형태로 발전된다면 머지않아 명실공한 아시아 3대 겨울축제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산천어축제를 빛낸 명예 홍보대사들


 일반적으로 ‘홍보대사’, ‘명예대사’로는 저명인사를 위촉하여 행사를 홍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화천군도 해마다 연예인 등 유명 인사를 선발하여 산천어 축제 홍보대사로 위촉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화천군은 다른 곳과 달리 민간인 홍보대사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산천어 축제가 겨울축제로 자리매김하는 데에는 민간인 명예홍보대사의 역할도 매우 컸다.

 민간인 홍보대사는 축제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열정적으로 참여한 사람들 중에서 조직위원회의 회의를 거쳐 위촉하고 있다.

 산천어축제의 첫 번째 민간인 명예홍보대사는 초등학교 때부터 축제에 참여해 왔던 고등학교 2학년생 양철훈 군이다.

 2003년 제1회 산천어축제부터 참가하고 있는 양 군은 산천어축제의 미숙한 운영 등에 대한 관광객들의 불만스러운 글이 홈페이지에 올라와 주최자들이 곤혹스러워하고 있을 때 ‘내가 경험한 축제는 그렇지 않았다’면서 반박성 댓글을 조목조목 올려 네티즌들의 불만을 자연스럽게 해결해주었다.

 두 번째 명예 홍보대사는 ‘나 홀로 소년’으로 유명해진 서울에 사는 초등학생 김현태 군이다. 김 군은 산천어축제에 참가하고 싶은데 부모님이 반대하자 몰래 버스를 타고 혼자서 축제장에 왔다가 산천어를 두 마리나 낚았다.

 그런데 뒤늦게 소재파악에 나선 부모님이 “어디에 있느냐?”가 묻자 “산천어축제에 왔다.”고 알린 뒤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되는 바람에 부모 자식 사이에 연락이 두절되었다.

 부모가 애타게 김 군을 찾고 있다는 소식이 축제를 주관하는 본부에 알려지면서 경찰, 소방, 군청 공무원 모두가 김 군을 찾느라 비상이 걸렸다. 다행히 김 군을 찾았고 서울행 버스에 오른 것을 확인한 뒤에 김 군의 부모님께 연락을 드려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그 뒤로 김 군이 서울 버스터미널에서 본인이 잡은 산천어를 품에 꼭 껴안고 잠든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되고 이것이 언론에 집중적으로 보도되면서 화제가 되었다.

 김 군의 산천어축제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사랑은 산천어축제를 홍보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이에 감동한 조직위원들이 만장일치로 그를 명예홍보대사로 위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김 군에 대한 홍보대사 위촉식은 창작썰매 콘테스트가 열리던 날 이루어졌는데 작가 이외수와 조경철 박사, 가수 현영까지 참석한 가운데 열려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세 번째 명예 홍보대사로 위촉되기에 앞서 화천군수로부터 표창장까지 받은 학생은 부천 북고등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는 반크 회원인 고아라 양이다.

 반크(VANK: Voluntary Agency Network of Korea)는 1999년에 만들어진 대한민국의 비정부 민간단체로 이들 회원들은 국가홍보와 교류를 통한 사이버 민간 외교관의 역할과 잘못된 국가정보에 대한 알림과 함께 교정권고까지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다.

 회원인 고 양은 반크 사이트 및 잡지를 통해 산천어축제 관련 홍보 기사를 영문으로 사진과 함께 실어 전 세계인들을 대상으로 알림이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위촉된 민간인 명예 홍보대사들은 축제의 모든 프로그램에 무료로 참여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축제 기념품도 선물 지급받는다.

 민간인 홍보대사 위촉은 축제인구의 저변확대와 더불어 시너지효과를 발휘하여 축제의 매력을 더해주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


 

 작가 이외수, 산천어축제, 화천의 브랜드 가치


 내가 작가 이외수를 알게 되고 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산천어축제와 쪽배축제를 하면서 “이외수를 홍보대사로 영입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나왔을 때부터였다. 그를 처음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마치 대화 속으로 빨려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그가 아무 대가도 없이 11명의 작가지망생들을 지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홍보대사가 이렇게 좋은 일을 하는데 군수인 내가 그냥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쌀을 선물하곤  했다.

 작가 이외수는 매년 12월말이 되면 하루 날을 잡아서 문하생들과 토론을 하며 밤을 지새운다. 나도 언젠가 춘천에 있는 격외선당(格外仙堂, 격식 없이 노니는 신선의 집)이라 불리는 이외수의 집에 진달래 막걸리 두 말을 들고 찾아간 적이 있다.

 그날 “내년부터는 화천에서 여러분과 자주 소주를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더니 그 말이 씨가 되어서 이외수가 화천으로 이사를 오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에 나는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 감성마을을 비롯하여 세 지역을 그에게 추천했고, 그는 세 곳을 다 돌아보고는 그중에서도 ‘감성마을이 가장 마음에 든다’며 감성마을로 이사 온 뒤 지금은 화천군민이 되어 작품 활동을 왕성하게 벌이고 있다.

 지금은 이외수의 전성시대이다. 이외수의 생존법을 다룬 그의 저서 ‘하악하악’은 2008년  여름에 11주 연속 교보문고 베스트셀러로 올랐다. 〈1박2일〉프로그램도 이외수 편을 찍고 나서부터 더욱 유명해졌다는 후문이다.

 이밖에도 그가 출연한 〈무릎팍 도사〉와 시트콤 〈해피선데이〉는 공전의 히트를 쳤고, 매주 월요일에서 금요일 밤 9시35분부터 10시 사이에 그가 직접 진행하는 라디오방송 〈이외수의 언중유쾌〉도 청취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그가 사는 감성마을을 관할하는 15사단에서도 골치 아픈 관심사병이 이외수와 하룻밤 자더니 깨끗이 나았다고 해서 15사단 명예홍보대사로 임명할 정도로 지역에서도 유명세를 더하고 있다.

 이외수가 산천어축제 홍보대사로 위촉되어 활동하면서 산천어축제의 방문객들도 부쩍 늘었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그의 브랜드 가치는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이에 화답하여 화천군도 이외수 글씨체로 새긴 시석림 999개를 세워서 이를 따라 오솔길을 가다 보면 이외수의 집필실, 교육장, 전시관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하는 이외수 전시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산천어축제와 작가 이외수는 화천사람들의 고향 찾아주기 운동에도 한몫하고 있다.

 과거 서울에 사는 화천사람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대개 ‘춘천’이라고 대답하고 s했던 게 현실이었다. 화천이라고 대답하면 다시 화천이 어디냐고 묻고, 춘천 옆에 있다고 그러면 춘천에서 얼마나 걸리느냐고 묻곤 하기 때문에 귀찮아서 그냥 처음부터 춘천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런데 산천어축제가 인기를 끌고부터 화천사람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화천이다.”, “화천이 어디에 있느냐?”, “산천어축제가 열리는 곳이다.”, “아 그곳이 화천이냐?” 이렇게 문답형태가 바뀌었다.

 그러더니 다시 작가 이외수가 화천으로 이사 온 뒤로는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화천이다.”, “아 ,이외수가 사는 곳?”이라는 형태로 문답이 쉽고 간결해졌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이 정도로 작가 이외수가 화천으로 이사를 온 뒤로 산천어축제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화천의 브랜드 가치가 덩달아 올라가고 있다.

 이외수와 산천어축제의 브랜드 가치에 편승해서 청정관광산업을 더욱 발전시켜 간다면 화천의 브랜드 가치와 영향력은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화천을 국내 수상스포츠의 메카로


 화천군은 2007년 아시아 카누선수권 대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아시아조정선수권대회를 2011년도에 개최하려고 준비 중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카누, 조정, 슬라럼, 드래곤보트를 비롯해서 호수 변을 따라 만드는 자전거 트레킹 코스, 물을 활용한 카누트레킹 코스 등 물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스포츠는 화천에서 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물에서 하는 모든 스포츠는 화천에 유치하고 싶다. 이 지역에 오는 사람들이 체험을 통해서 물을 알고 건강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나의 생각에서다.

 화천은 인천과 비교했을 때 해발고도가 103m나 높다. 물은 가득 차 있고, 여건은 다 되어 있는데 배가 운행되지 못 하는 것은 중간에 댐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도크를 만들 수밖에 없으니 배가 넘어올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역발전을 위해 운하를 적극 찬성하고 있다.

 화천군은 쪽배축제도 하고 있다. 산천어축제가 겨울축제라면 쪽배축제는 여름축제이다. 쪽배는 말 그대로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이란 노랫말에 등장하는 작고 하얀 쪽배다.

 무동력으로 물에 뜨는 모든 배가 쪽배다. 나는 쪽배 콘테스트를 통해 바다로 발길을 돌리는 여름 관광객들을 화천의 산과 물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활성화는 안 되었지만 물에서 할 수 있는 것 중에는 수상골프도 있다.

 또한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섬에 꽃을 심어서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이 꽃섬을 지나가게 하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트레킹코스를 통해서 물을 건너게 하고 싶다.

 이렇게 연인, 또는 은퇴한 노부부들이 호수 변을 따라 활용할 수 있는 자전거 도로와 산책로를 만든다면 전원생활을 좋아하는 분들이 쉬고 즐기면서 건강도 챙길 수 있게 된다.

 이들이 화천에 와서 에너지를 재충전 하는 장소로만 가꾸어 놓아도 화천군민들은 자연스럽게 경제적인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더불어 전국여자 축구대회, 레슬링국가대표 선발전에 이어 체육관을 새로 지으면 세계 배드민턴대회를 유치할 수 있는 여건도 마련된다. 화천은 축구 잔디구장도 7개나 있어서 전국대회의 유치뿐만 아니라 전지훈련 장소로도 활용할 수 있다.



물의 나라, 얼음의 나라, 눈의 나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계 최대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화천군에도 15m 크기의 물레방아가 있다. 지금은 수로가 마땅치 않아서 가동은 하지 않고 있지만 물이 흐르는 폭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화천군이 물레방아를 만든 것은 이 지역이 물의 고장(Country of Water), 얼음의 고장(Country of Ice), 눈의 고장(Country of Snow)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어서였다.

 물, 얼음, 눈의 3가지를 합치면 Wisdom country의 줄임말인 WIS(Water, Ice, Snow)가 된다. 물, 얼음, 눈의 기본속성은 모두가 물이다.

 물은 생물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물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일찍이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는 ‘물은 우주의 모든 것의 기본이 되는 원소’라고 표현했다.

 물은 지구의 기후를 좌우하며, 모든 식물이 뿌리를 내리는 토양을 만드는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물의 또 다른 형태인 증기나 수력은 전기로 바뀌어 기계를 돌리는 힘을 만들어낸다. 이렇듯 물은 모든 생물들에게 가장 중요한 물질이다.

 그런가 하면 물은 생체(生體)의 가장 중요한 성분이다. 실제로 인체는 70%, 어류는 80%, 그 밖에 물속의 미생물은 약 95%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

 물은 청정함을 유지하게 해준다. 먼지가 물에 떨어지면 이를 떠내려 보냄으로써 공기를 맑게 해주고 자정작용을 통해 깨끗한 도시가 되도록 도와준다.

 화천군의 86%를 차지하는 산과 5%를 차지하고 있는 호수는 지구의 허파 역할을 하지는 못할지언정 대한민국 수도권의 허파가 되고 젖줄이 될 수는 있다. 이처럼 물의 중요성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그래서 화천군을 위스 컨트리(Wis country)라고 하고, 물의 고장(Country of water), 얼음의 고장(Country of ice), 눈의 고장(Country of snow)이라는 용어는 화천군만 사용할 수 있도록 인터넷 등록까지 마쳤다.

 화천군은 앞으로 호수 변의 관광자원을 상품화하는 것은 물론, 지역 최대이자 최고의 자원인 물을 이용한 산천어축제와 쪽배축제에 이어 호수 변 100리 코스를 활용해 수상스포츠의 메카로 가꾸려고 한다.

 이는 에코파라다이스(Eco-paradise) 화천의 실현을 통해 화천군을 지혜로운 고장을 만들어가는 길이 될 것이다.


 

국민가곡 비목(碑木)의 발상지, 백암산 기슭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비목이여.


 한명희가 시(詩)를 쓰고, 장일남이 곡(曲)을 붙였다는 국민가곡 비목(碑木)의 가사 중 일부다. 비목(碑木)은 ‘나무로 세운 묘비’란 뜻인데 6.25 전쟁의 상흔(傷痕)이 담긴 이 곡을 듣노라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마음마저도 숙연해진다.

1964년 화천군 백암산 휴전선 부근을 순찰하던 한명희(당시 25세. 전 서울시립대 음대교수) 소위는 허물어진 돌무덤 하나를 발견한다. 6.25때 숨진 어느 무명용사의 무덤인 듯, 그 옆에는 녹슨 철모가 뒹굴고 있었고, 십자가 비목은 썩어 금세 쓰러질 듯했다.

 그로부터 4년 뒤 동양방송 PD로 일하던 한 씨는 작곡가 장일남으로부터 가곡에 쓸 가사를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당시의 심정을 담아냈다. 이것이 바로 비목이라는 노래이다.

 <비목>이 국민 모두가 즐겨 부르는 가곡이 된 것은 1970년대 TV 연속극의 배경음악으로 쓰인 뒤부터다.

 6.25 한국전쟁 때 화천군은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그래서 화천군에는 청춘을 꽃피우지 못한 채 산화(散華)한 젊은 무명용사들의 이름 없는 비석이 아직도 많이 널려 있다.

 비목문화제는 이런 호국영령의 명복과 은덕을 기리기 위해 1996년부터 시작했다. 올해로 14회째를 맞은 비목문화제는 국민가곡 ‘비목’의 발상지인 백암산 자락과 화천강변의 붕어섬을 중심으로 해마다 6월에 열리는 전국 규모의 추모행사다.

 나는 화천군이 관광자원을 개발하려면 이들의 영혼부터 달래준 다음에 관광객을 유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난해 세계평화관 종교 지도자회의를 할 때 이들에 대한 진혼제를 지내준 적이 있다. 이제는 이들의 영혼을 달래주는, 영혼을 관객으로 하는 제대로 된 산상음악제를 열어주고 싶었다.

 백암산에는 피아노를, 평화의 댐에는 오케스트라를, 그래서 직선으로 12km가 넘는 거리를 두고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협연하는, 영혼을 달래는 그런 음악제를 열어주고 싶었다. 

 화천군민들에게 파로호(破虜湖)는 생명의 젖줄이다. 그러나 파로호는 6.25때 중공군 3만 명이 수장된 가슴 아픈 사연이 담긴 곳이다. 

 인도적인 시각에서 보면 적군의 영혼도 영혼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자기의 치부는 드러내지 않으려는 속성이 있지만 사실은 적군보다 더 많은 아군 병사들이 이곳 백암산 전투에서 안타깝게 숨을 거두었다.

 그로 인해 6~7만의 젊은 영혼들이 50년이 넘도록 파로호를 떠돌아다니고 있다면 한번쯤은 그네들의 영혼을 진지하게 위로해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2009년 9월 15일 이곳에서 산상음악제를 열고 진실한 마음으로 이들의 영혼을 달래주는 행사를 가졌다.



평화의 댐, 어제와 오늘


‘평화는 결승선이 없고, 평화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필요한 것입니다.’

 남미에 위치한 코스타리카의 산체스 대통령이 남긴 평화의 메시지는 분단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화천군의 인구가 줄어들고 지역 경제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공교롭게도 1988년 이곳에 평화의 댐을 건설하고부터이다.

 그 무렵 TV에서는 북한이 금강산댐을 무너뜨리면 서울은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고 여의도의 63빌딩이 반은 물에 잠기므로 평화의 댐을 빨리 건설해야 한다고 난리법석을 피웠다.

 그 바람에 화천사람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정부의 평화의 댐 건설과정을 순순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600억 원을 들여 80미터 높이의 평화의 댐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파로호의 물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군부대의 외출외박 정량제가 실시되면서 지역의 유일한 경제 버팀목이었던 군인들과 면회객의 발길이 뜸해지자 화천군은 마치 폐허의 도시처럼 변해갔다.

 그로부터 15년 뒤인 2003년 정부는 또다시 국민도 모르게 무려 2,000억 원이라는 엄청난 예산을 들여 평화의 댐에 45미터를 더 높게 쌓는 2차 공사를 시작하겠다고 나섰다.

 99년도에 금강산댐이 금이 가면서 조금만 더 물이 넘쳤으면 평화의 댐이 범람할 수 있었다는 국가 안보적 판단에 따라 내려진 조치였다.

 ‘국가안보’라는 이유로 화천군민들만 속수무책으로 계속 불이익을 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나는 군민과 더불어 정부를 상대로 항의시위에 나섰다. 그 후 평화의 댐은 홍수조절용 댐으로 인정받아 화천군도 470억 원의 보상금을 받으면서 이를 군민을 위해 사용할 종자돈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화천군민에게 파로호는 생명의 호수나 마찬가지다. 평화의 댐이 생기기 직전까지만 해도 파로호에는 하루에 1,000명 이상의 낚시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평화의 댐이 건설된 이후로는 연간 1,000명도 찾지 않고 있다.

 2차에 걸친 평화의 댐이 완공된 뒤에 나는 지역발전을 위해 댐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면서 해법 찾기에 몰두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이삼열 유네스코 총장 부인인 손덕수 교수가 이곳에 와서 한참을 둘러보다가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시작되는 곳(Last war, and begin Peace.)’이라고 평화의 댐에 대해 독특한 정의를 내리는 것을 들었다.

 손 교수의 이색적인 정의에 아이디어를 얻어 이곳에 ‘평화의 종’을 설치하고 각종 상징물을 만든 다음, 평화의 댐을 평화가 시작되는, 평화의 메카(Mecca)로 가꾸기로 했다.

 우선 평화의 종에는 이데올로기적, 인종적, 종교적 분쟁이 있는 나라들로부터 탄피를 거둬서 이를 녹여 평화의 종에 담기로 하고 각계의 협조를 요청했다. 아울러 열두 명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에게는 평화의 메시지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영국성공회 첫 대주교인 데스몬드 투투가 동영상을 만들어 보내왔고, 달라이라마와 러시아의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 얼마 전 서거하신 故 김대중 전 대통령도 평화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한승수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노벨평화상을 받은 북아일랜드 출신의 마거릿 여사, 고르바초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실제 손을 핸드 프린팅하여 통일을 염원하는 악수의 손도 제작하여 설치했다.

 드디어 5월26일 화천군은 평화의 댐에 만관 규모의 평화의 종을 설치하고 역사적인 준공식을 치렀다.

 평화의 댐과 평화의 종은 국민들에게 안보정신을 되새겨보는 소재로 사용하는 동시에, 화천을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시작되는 새로운 안보관광지로 발돋움하도록 할 것이다.

 

자치단체장은 중지(衆智)를 모으는 사람이 되어야


 나는 정책을 결정하기에 앞서 남의 의견을 많이 듣는 편이다. 그러나 아무리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도 정책을 결정해야 하는 최종 순간에는 직접 판단을 내린다. 그래서 때로는 독선적이라는 비판도 종종 듣는다.

 지도자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자치단체를 이끌어가는 단체장들은 중지(衆智)를 잘 모을 줄 알아야 한다.

 중지란 여러 사람의 지혜이다. 배우려는 자세를 갖고 늘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지도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겸손한 자세를 보인다. 지혜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지도자일수록 정책결정을 오히려 잘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자기가 부족함을 알기에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이야기하도록 함으로써 중지를 모으려고 하는 것이다.

지도자는 때로는 동물적 감각을 가지고 정책을 결정할 수 있다. 나도 이따금 그렇게 결정할 때도있지만 어디까지나 동물적 감각일 뿐이다.

 이보다는 많은 사람들의 지혜를 모으고 이를 통해 정책을 결정해나가는 것이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나는 행정을 추진하는 동안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게 되면 공무원들을 적당히 긴장시키고 경쟁을 많이 유도하는 편이다. 변화의 시대에 앞서가려면 무엇보다도 변화를 이끌어갈 공무원들이 먼저 변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책도 많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공무원들에게 책 돌려 읽기를 생활화하고 이들의 독후감을 받아 1등한 사람에게는 배낭여행이라는 상품을 주고 있다. 군정시책 아이디어를 모집하면 1등을 한 사람에게도 역시 배낭여행의 기회를 준다.

 이들에게 다른 상품보다도 배낭여행을 할 기회를 주는 것은 이를 통해 견문을 넓힐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에서다. 사람이 어떤 장소를 가 본 것과 가보지 않은 것, 벤치마킹을 한 것과 하지 않은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이 때문에 일부 직원들은 새로운 사업이 시작되면 "군수가 또 경쟁을 시키는 것 아니냐?"면서 잔뜩 긴장을 한다. 그러나 경쟁을 통해서 공무원들이 잠재력을 개발하도록 하는 것은 단체장에게는 매우 중요한 역할이다.

 공무원의 잠재력은 무한하지만 단체장들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사고방식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변할 수도 있고,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차별화만이 살 길이다.


 화천군 상서면 '토고미 마을'은 화천군은 물론 전국에서도 농촌체험마을의 선두주자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농촌의 새로운 발전모델을 제시한 토고미 마을은 산과 계곡 등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다.

 1999년부터 친환경 오리농법을 시작한 '토고미 마을'은 농림부 녹색농촌체험마을, 행정자치부 정보화마을 등 농촌 가꾸기 국책사업에도 적극 참여한 결과 농림부 마을가꾸기 경진 대상, 농촌진흥청 세계농업기술 대상도 받았다.

 곤충체험관, 수확작업과 트랙터 마을투어 등 다양한 농촌체험, 당나귀타기 등 문화체험, 그리고 자연환경을 이용한 물놀이 등은 농촌체험마을인 토고미 마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체험 프로그램들이다.

 토고미 마을은 여름철이 되면 깨끗한 산천어밸리의 물놀이, 별자리 관찰, 오리잡기, 다슬기 줍기, 옥수수 등 농산물 수확체험, 체험학교 같은 프로그램들이 운영된다.

 대표적인 체험 프로그램으로 오리농군 체험, 현미가공 체험, 허수아비 만들기, 인절미 만들기, 장 담그기 등이 있다.

 토고미 마을은 2002년 가을부터 삼성전기와 결연을 맺고 농촌체험 프로그램 운영을 시작했다. 삼성전기는 토고미 마을의 폐교를 사들여 강의실, 숙박시설, 식당을 고루 갖춘 자연학교를 조성하고,여름이면 이곳에서 각종 교육과 체험학습을 진행하고 있다.

 덕분에 유기농 농산물 판로를 고민하던 토고미 마을은 삼성전기 수원 본사가 구내식당    직원급식에 유기농 식단을 운영하면서 연간 1억 원의 농산물 판매 소득을 올리는 등 기업과 농촌마을이 상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린 투어리즘의 선두주자인 토고미 마을은 쌀로 친환경농업을 시작했지만 친환경 농업은 이미 전국에 보편화된 지 오래다.

 그래서 화천군은 7개 마을을 새롭게 선정하여 색다른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토고미가 농촌체험을 집중적으로 하고 있다면 동촌리는 농 산 어촌이 복합된 마을로, 광덕리는 산간마을과 농촌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차별화를 해나가고 있다.

 이밖에도 한쪽에서는 블루베리나 크린베리를 심어서 현대인들이 선호하는 잼과 식초를 만들고, 한쪽에는 산채단지를 조성해 신선한 산채를 수도권에 공급하는 차별화된 농법을 구사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네트워크의 가치는 차별화가 부각될 때 효력을 발휘한다. 화천군이 2004년부터 목재과학단지를 만든 것도 여기서 나오는 부산물인 목초액이나 목탄을 보급하여 농촌을 친환경적으로 가꾸어나가기 위해서였다.

 화천군은 다른 지역보다 농토가 상대적으로 적어 유기농과 친환경으로 승부를 걸지 않는 한 다른 지역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새로운 도전은 새로운 고통을 낳고, 더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화천군은 일교차가 커서 영양분이 꽉 찬 ‘찰 토마토’가 생산된다. 이를 명품으로 브랜드화하기 위한 토마토축제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

 에스파냐의 작은 도시 부뇰이라는 마을은 해마다 8월이면 수백만의 인파가 모여들어 토마토축제의 한 프로그램인 ‘토마토 전쟁’을 즐긴다. ‘토마토 전쟁’은 1944년 토마토 값 폭락에 분노한 농부들이 시의원들에게 분풀이로 토마토를 던지면서 유래된 축제이다.

 오전 11시가 되면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관광객들과 주민들은 대광장 (Plaza Mayor)과 주변 거리에 모여 있다가 트럭으로 운반된 토마토를 한 움큼씩 쥐고는 2시간 동안 던지며 쌓였던 스트레스를 날리는 토마토전쟁 놀이에 흠뻑 젖어든다.

 이처럼 에스파냐의뇰은 축제기간 동안 수백만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는데 이보다 더 좋은 토마토를 생산하는 화천군이 토마토 축제를 성공시키지 못하라는 법도 없다.

 화천군은 2009년 처음으로 정부지원을 받아 토마토 공원을 만들었고, 오뚜기 식품과 함께 이곳에 대형 조형물도 세웠다.

 광덕리 찰토마토를 재료로 케찹을 생산하는 오뚜기 식품은 축제기간동안 1,000명분의 스파게티를 제공해서 호평을 받기도 했다. 지방자치단체의 축제는 역시 차별화된 축제로 가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지역발전을 위한 인재양성


 강원도 도청에서 14년 동안 근무하면서 나는 학연, 혈연, 지연 등 인맥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지역의 인재를 많이 키워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화천군은 여름과 겨울방학을 활용해 1년에 32명씩 해마다 관내 중 고등학생들을 캐나다에3주간 영어연수를 보내고 있다.

 화천군에서 근무할 때에는 몰랐는데 외지에 나가서 근무해보니 화천군의 교육여건이 얼마나 열악한 지가 피부에 절실하게 와 닿았다.

 그래서 제일 먼저 시작한 사업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해외연수를 보내는 일이었다. 3주의 해외연수는 짧다면 짧은 편이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연수를 받은 학생들이 국제적인 감각을 갖고 돌아와서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이들이 장차 커서 훌륭하고 유능한, 화천군을 생각하는 인재가 되지 않을까?

 화천 출신의 학생이 고등학교 때부터 외지로 나가서 공부하면 고향 화천의 정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이에 신활력 사업으로 학습관을 지어 중학교 3학년과 고등학교 1~3학년까지 4개 학급 60명의 학생들에게 숙식을 하는 집중교육 프로그램도 시작했다.

 시골에서도 수도권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학습여건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화천군의 인구가 줄어드는 것도 따지고 보면 학습여건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이는 화천군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학생들이 명문대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준다면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무조건 외지로 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시작한 사업이다.

 2008년부터 벌인 사업이어서 아직 효과가 나타날 시점은 아니다. 그러나 중학교에서 성적이 상위 10%정도의 우수한 15명 가운데 13명이 화천고등학교로 진학해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에 성공가능성은 높다고 보고 있다.

 앞으로 2~3년 뒤에 이들이 명문대학에 진학한다면 춘천이나 서울로 공부하러 나가지 않아도 명문대학에 갈 수 있다는 본보기가 된다.

 이들이 서울대, 연대, 고대에 입학하면 학자금의 50%를 지원해 줄 계획이다. 1995년에 5억 원을 가지고 시작한 장학 사업은 현재 금액이 20억 원으로 늘어났으며, 앞으로 2014년까지 40억 원 모금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

 장학기금이 60억 원을 넘으면 화천에 있는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할 경우 전액 장학금을 지급하는 것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자전거 이야기


 나는 화천군에서 근무하는 동안 항상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자전거 출퇴근은 나의 일상적인 삶 자체였고, 자전거를 생활화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자전거 마니아가 됐다.

 녹색성장을 위해 자전거를 탄 것이 아니다. 그런데 작년 말부터 정부가 자전거타기 운동을 전국적으로 추진하면서 자전거 타기 붐이 조성되고 있다.

 시골에서는 공무원이 자전거를 타면 주민과의 소통 채널이 넓어진다. 군민들 중에는 일이 바빠 군청에 방문하기 어려운 분들도 있다. 괜스레 관청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분들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들을 수 있다. 자전거는 이렇듯 주민의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서울에서 퀵서비스 업체들이 자주 사용하는 오토바이가 자동차 사이에서 틈새시장 역할을 하는 것처럼 시골 읍내에서도 차량이 붐빌 때 자전거는 나름대로 틈새시장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다.

 한번은 헬기를 타고 산천어축제 현장을 돌아보아야 하는데 도로가 차량들로 꽉 막혀서 갈 수 없었다. 그런데 막힌 도로의 차량 사이로 자전거를 타고 가니 5분도 안 되어서 헬기가 있는 곳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자전거는 편리한 점들이 많다. 게다가 비용이 들지 않는다. 관용차를 이용하면 기사가 있어야 하고, 기름도 넣어야 한다. 그러나 자전거를 이용하면 기사를 부르지 않아도 된다. 기름도 들지 않는다. 그저 몸만 가면 되고 덤으로 건강까지 챙길 수 있다.

 자전거는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으며 차가 다닐 수 없는 좁은 길도 갈 수 있다. 자전거는 이처럼 편리하기 때문에 타는 것이다. 편하게 동네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하기에 가장 좋은 것이 운송수단이 자전거다.

 화천부군수로 처음 부임해 왔을 때에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자 일부에서는 “부군수가 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느냐?”며 품위가 떨어진다고 했다.

 내게 있어서 자전거는 생활 그 자체였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전시용이 아니었다. 지역적 여건이나 주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전국에 자전거 도로를 개설하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라고 본다.

 이동거리가 보통 20~30km이상 되는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 자전거 도로를 개설하는 것이 효과가 있을지도 의문이다.

 산 좋고 물 맑은 청정지역인 화천군은 자전거 타기에 적합한 곳이다. 이곳에 42.195km(100리길)구간의 자전거 도로를 개설하면 자전거 트레킹뿐만 아니라 호수 주변을 달리는 마라톤 코스로도 활용할 수 있다.

 3년 전부터 구상했던 자전거 트레킹 코스가 조금씩 완성되어가고 있다. 예산이 없어서 1km씩 개설하다 보니까 어려움도 많았다. 아직은 준비단계에 있어서 장담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화천을 ‘자전거의 메카’로 만들고 싶은 것이 나의 꿈이다.

 1백리 길의 자전거 전용도로가 개설된다면 화천군은 자연을 벗 삼아 심신의 에너지를 축적할 수 있는 최적의 자전거 트레킹 장소로 활용할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이곳에 자전거 엑스포 컨벤션을 만들어 관련 제품을 망라해 놓고, 자전거 타기 대회와 산악자전거 경주대회도 열고, 자전거에 대한 모든 것을 이곳에서 이야기할 수 있도록 자전거 엑스포를 개최하고 싶다.

 그렇게 된다면 화천군은 새로운 스포츠 마케팅을 통해 지역경제의 활성화도 도모할 수 있게 되고, 현직에서 은퇴한 노부부들이 100리 길 자전거 트레킹 코스를 따라 대자연과 호흡하는 동안 이곳에서 건강도 되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군수선거는 바람선거가 아닌 낙엽선거


 나는 공무원 생활 32년 가운데 17년을 화천군에서 보냈고, 화천부군수로 근무하다가 출사표를 던져 민선군수에 당선됐다. 지역에서 공무원 생활을 오래 했다는 것은 유권자들에게는 그리 내세울 경력이 못 된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까지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서민과 항상 함께 하는 이미지를 심어준 덕분이다. 나는 공직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재래시장의 경비원부터 시작했다.

 또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언제나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강원도 도청에서 서기관으로 승진한 후 금의환향하여 고향 화천에 부군수로 영전해 왔을 때에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났다.

 이런 모습들이 유권자들에게는 ‘고위공직자가 아닌 서민, 주민 옆에 늘 있는 우리의 이웃, 지역발전을 위해 뭔가를 해보려고 노력하는 친근한 공직자’라는 이미지와 신뢰감을 심어주었던 것 같다.

 2002년 화천군수 선거에는 4명이 출마했는데 내가 5534표로 40.26%를 득표하여 3815표를 득표한 2위 후보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당선됐다.

 그러나 선거전은 예상외로 치열했었다. 선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나 역시도 14년 동안 화천군을 떠나 강원도 도청에서 근무하는 동안 생긴 공백으로 인한 서먹서먹함 때문에 유권자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상대 후보도 중앙에서 공무원 생활을 오래한 탓인지 지역주민과 정서적인 면에서 나보다도 더 잘 어울리지 못했던 것 같다.

 그 바람에 나는 상대 후보가 나온 지역의 투표구 3곳 중 두 군데에서만 지고, 한 군데에서 이겼으며, 나머지 네 개 읍면에서는 줄곧 우위를 지키며 민선3기 군수로 영예롭게 당선될 수 있었다.

 2006년 민선4기 선거에서는 3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나는 현직군수여서 선거운동을 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산천어축제의 성공적 개최 등 가시적인 성과 덕분에 69.4%라는 압도적인 표를 얻어 재선될 수 있었다.

 시골의 군수선거는 바람선거가 없다. 오로지 낙엽선거만 있을 뿐이다. 시골의 유권자들은 대체로 보수적이다. 길거리에서 열 번 인사를 해도 자기 집으로 찾아가지 않으면 못 봤다고 하는 곳이 시골 유권자들이고 이들의 표심이다.

 따라서 시골에서 선거에 당선되기를 바란다면 출마자들은 바람에 의존하려는 전략보다는 낙엽을 하나하나 줍는다는 마음으로 유권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표밭을 다져야 한다.


좌우명, 이소성대(以小成大)


 수년 전 일이다. 한 친구가 내게 “좌우명이 뭐냐?”고 묻기에 “좌우명이 없다.”고 했더니 “그러면 너는 공무원으로서생각도 없이 살아가느냐?”며 핀잔을 주는 것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작게 시작해서 단계적으로 키워가는 것이 나의 인생관"이라고 했더니 “그러면 이소성대가 좌우명이네?”라고 정리해주어 그때부터 나의 좌우명은 이소성대가 되었다.

 이소성대(以小成大)란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큰일을 이루는 것을 뜻한다.

세상일은 모든 것이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성실하게 나아갈 때 큰일도이루게 되어 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속담처럼 계곡의 물이 모이면 강물을 이루고, 다시 강물이 모여서 바다를 이루는 법이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겼다는《열자(列子)》<탕문편(湯問篇)>에 등장하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이야기나, 민족주의자 도산 안창호의 점진주의도 이소성대의 정신과 맥을 같이 한다.

 사업도 작은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점차 큰 것을 성취하는 것이다. 성불(成佛)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작은 것을 정성껏 잘 하면 큰 것은 절로 이루어진다. 큰 것만을 바라보다가 작은 것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무슨 일이든 작은 일에서부터 출발하여 점진적으로 큰일을 이루려고 해야지 일확천금의 요행수를 바라거나, 부당한 투기로 많은 돈을모으려 하고, 폭리를 취하려는 것은 이소성대의 정신에 어긋난다.

 ‘비록 그시작은 미미하지만 그 끝은 창대하리라.’

 성경 말씀처럼 큰 사업이나 큰 기업들도 처음의 시작은 미미했었다. 그러나 작은 힘이 쌓이고 쌓여서 세력이 확장되고 힘이 한데로 모아지면서 차츰 결실을 이루게 된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군정을 추진하면서 작게 시작해서 조금씩 확대해 나가는 이소성대 주의로 일관해 왔다.

 처음부터 일을 크게 벌였다가 용두사미가 되는 것보다 이소성대의 원칙에 따라 작게 시작해서 하나씩 추진해나가면서 차츰 차츰 외형을 키우는 것이 훨씬 효과가 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산천어축제도 이소성대의 원칙에 따라 기반들을 하나하나 구축하면서 외형을 키워온 결과, 이제는 아시아 3대 겨울축제로 발전할 정도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자전거 도로 개설도 처음에는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산과 호수 사이에 난 좁은 도로를 활용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100리길의 도로 개설과 더불어 웰빙 시대와 녹색성장에 걸맞은 자전거 엑스포를 추진하는 문제로 구상을 점차 키워가고 있다.

 좌우명은 아니지만 곡운구곡 김수증 선생의 13대 후손인 여초 김응현 선생이 써서 내게 준 ‘수기초심 시종불변(守基初心 始終不變)’이라는 글귀가 있다.

 여초 선생의 작품은 1점 당 5백만 원씩에 팔릴 정도로 고가이며, 선생은 중국에서도 알아주는 서예가로 인정을 받았던 분이다.

 그가 인제에서 살고 있을 때 네 번이나 찾아가 큰절까지 하고 고군구곡 복원사업을 추진하겠다고 했더니 눈물을 흘리며 내게 작품을 써주고는 ‘군수가 되었을 때의 초심을 잃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는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나는 지금도 그가 남긴 ‘수기초심 시종불변(守基初心 始終不變)’의 글과 이소성대(以小成大)라는 좌우명을 담은 족자를 머리맡에 두고 자기 전에 한 번씩 읽어보면서 하루 일과를 반성하고 있다.




내가 그리는 화천의 미래


내 전 재산은 1억4천만 원이다. 재산 순위는 강원도 시군 자치단체장 중에서 거의 꼴찌 수준이다. 2003년에 공직자 재산등록을 할 때에는 마이너스였는데 6년 동안 번 돈은 아파트 값이 올라가서 1억 원이 된 것이 전부다.

 청렴을 자랑하자고 꺼낸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정갑철 화천군수의 현주소다. 어찌 보면 자원이 없는 화천군 전체의 현주소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21세기 미래의 화천은 어떤 모습을 담아야 할까. 화천군의 인구는 전체 6만 명 중에서 60%인 3만6,000여 명이 군인이다. 순수한 군민은 2만4,000명뿐이다.

 전체 면적에서 임야가 차지하는 비중이 86%다. 활용가능한 면적은 9%에 불과하다. 따라서 화천군이 새로운 활로를 개척해나가려면 새로운 관광자원을 찾아나서는 길밖에 없다.

 이를테면 6.25의 상흔(傷痕)을 담은 비목과 수만 명의 아군과 적군의 목숨을 앗아간 파로호, 곳곳에서 치열한 격투가 벌어졌던 백암산 기슭, 아직도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평화의 댐과 연계된 것들이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각각의 자원은 흩어져 있으면 그 빛을 발하지 못하지만  이를 하나하나 묶어서 스토리텔링 작업을 시도하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지역의 숱한 사연들을 되살려 이를 하나의 이야깃거리로 묶고 교육과 관광자료로 활용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본다.

 지방자치가 성공하려면 중앙정부의 지원보다도 지방자치를 이끌어가려는 구성원들이 지역의 열세를 극복하려는 의지와 자세가 더 중요하다.

 조직의 리더나 구성원들이 개인 욕심만 내지 않는다면 분명히 성공할 수 있는 일이다.

 화천에는 조경철 천문과학관과 시조시인의 대가인 동천리 이태극 문학관, 역사를 복원하는 고군구곡이 있고, 작가 이외수가 사는 감성마을이 있다.

 이들을 파로호와 연계된 안보문화 관광권과 호수문화 관광권으로 묶어서 화천군을 에코 파라다이스를 지향하는 수상 특성화 도시로 이미지를 바꾸고, 물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활동과 스포츠들을 엮어서 1박2일, 또는 2박3일의 관광코스를 체계적으로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허황되다 할지 모르나 나는 이러한 에코 파라다이스(Eco-Paradise)화천을 꿈꾸고 있다. 아직은 구상단계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이것이 현실화되면 화천은 건강하고 청정무구한, 그러면서도 스토리텔링이 있는 새로운 관광명소로 변신하게 될 것이다.

 에코 파라다이스 화천군이 지혜로운 고장이 된다면 화천군은 작지만 가장 강한 군으로, 전국에서도 잘 사는 군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지역주민들로부터 신뢰를 확보하고 공감대를 형성해나가는 일이다. 자치단체장이 지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기란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이야기처럼 아무리 잘해도 반대파는 있게 마련이고, 이로 인해 때로는 본의 아니게 곤혹스러움을 느낄 때도 있다.

 단체장의 역할은 지역민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그 욕구를 파악해서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이를 실천해나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지역의 비전을 주민들과 공유하고 함께 추진할 수 있다면 지역발전은 한층 더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끝>

[출처] 정갑철 화천군수의 휴먼 스토리 #정갑철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