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쏙] 한겨레가 만난 사람 ‘사진가…국악 전도사로…’ 김영일의 이중생활 | |
구본준 기자 | |
보통 사람들에겐 알려지지 않은 사진 세계가 있다. 인물 사진 한 장에 천만원대 값을 아낌없이 치르는 초고가 초상사진이다. 재벌급들만 상대로 하니 따로 홍보도 하지 않는, 그야말로 아는 사람들끼리만 알아서 연락해 찍는 사진의 명품 같은 시장이다. 사진가 김영일(48)씨는 이 비밀스런 초상사진 분야에서 가장 잘나가는 사람이다. 전직 대통령이며 수많은 재벌 회장들이 그에게 증명사진을 찍었다. 이 김영일씨가 어느 날 갑자기 국악 전도사가 됐다. 국악음반사 ‘악당이반’을 차려 음반을 내고, 국악 연주 전용 한옥 공연장을 짓고,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청소년 국악도들에게 악기를 지원한다. 지금까지 김씨가 국악에 쓴 돈은 줄잡아 40억원. 정작 자신은 집도 없이 전세에 산다. 국악에 모든 것을 쏟아붓기로 작정한 이 독특한 사진가를 10일 서울 북촌에 있는 아름지기 재단 한옥에서 만났다.
명품 사진가로 사는 법
-가장 비싼 초상사진가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고액 증명사진은 도대체 뭐가 다른 겁니까?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최고의 이미지를 추구한 사진을 서비스하는 겁니다. 보통 신형 자동차 사진을 찍는 데 광원용 전력으로 3만에서 6만와트쯤을 씁니다. 저는 인물 사진 한 컷에 4만와트를 써요. 사진 장비만 한 트럭이고, 발전 장비 실은 차가 따라붙어야 합니다. 다들 영화 찍는 줄 압니다. 이렇게 요란을 떨지만 그래도 결국은 결과로 승부하는 거죠.”
-가격이 상당하겠습니다. “액수를 말씀드리긴 좀 …. 저는 한푼이라도 깎으면 거절합니다. 유명한 화가에게 초상화를 부탁하는 것보다는 훨씬 싼 것일 수 있습니다. 전공이 초상사진이어서 최고의 초상사진가가 되자고 열심히 박았는데(그는 꼭 사진을 ‘박았다’고 표현했다), 어느날 회장님 한 분이 부탁해서 처음으로 했습니다. 그 뒤로 비서실들끼리 이야기가 돌았는지 계속 연락이 왔습니다.”
그러나 프로 사진가로서 그의 주특기는 초상사진만이 아니다. 화려한 잡지 사진과 광고 사진의 세계다. 사진학과를 나와 미국 유학을 마친 김씨는 1990년 한 문화잡지의 사진디렉터로 들어갔다. 그의 사진은 달랐다. 바둑황제 조훈현은 왼쪽 눈만 달랑 찍었고, 소년 씨름 천재 강호동은 승부 도중 배꼽을 당겨 찍었다.
-조훈현씨 사진은 왜 눈만, 그것도 왼쪽을 찍었나요? “조훈현씨의 매서운 이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게 눈입니다. 그런데 오른쪽 눈보다 왼쪽이 더 매서웠습니다. 그 뒤로 잡지들이 창간할 때마다 요청받고 참여해서 한때 제 별명이 ‘창간돌이’였습니다.”
-연예인 사진도 찍습니까? “제가 정치인은 안 찍습니다. 사진은 진실을 담는 겁니다. 재벌 사장님 사진이 명품 사듯 찍는다고 해도 자신이나 가족 모습의 진실을 담아 남기려는 것 아닙니까. 정치인 사진은 벽보나 포스터로 쓰려는 사진입니다. 그런 목적에 쓰는 사진은 하기 싫었습니다.
연예인은 (안 찍는 게) 다른 이유입니다. 한때 패션 사진을 했는데, 프로젝트를 맡으면 중만이 형(사진작가 김중만)에게 연락해 함께 작업했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박고 나면 모델들이 저한테는 ‘선생님, 수고하셨어요’라고 하고, 중만이 형한테는 ‘오빠, 고생했어’ 그러는 겁니다. ‘이 바닥을 하려면 저도 귀도 뚫고 머리도 묶으면서 이 사람들하고 좀 비슷해져야 하는구나’란 걸 깨달았습니다. 제 성격상 그건 좀 힘들겠다 싶었습니다.”
대청마루 국악 예찬
“원래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지만 국악엔 아무 관심 없었어요. 라디오에서 나오면 다이얼을 돌리거나 꺼버리던 사람이었습니다.
1996년에 한 잡지에서 젊은 음악가들의 사진 시리즈를 의뢰받아서 채수정이란 젊은 국악인을 박게 됐습니다. 당신은 소리하는 사람이니 자연스럽게 소리를 해라, 나는 사진을 박겠다, 그랬어요. 수정씨가 그때 어떤 단가를 불렀는데 나중에 들으니 <편시춘>이란 곡이었습니다.
‘아서라 세상사 쓸 것 없다’라고 노래가 들려오는데, 갑자기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일생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어떤 모델 앞에서도 떠는 법이 없었는데, 젊은 소리꾼의 목구성에 완전히 얼어버린 겁니다. 모든 감성과 모든 이성적 판단이 그냥 정지가 되는 거예요. 나를 이렇게 한 방에 때려눕히는 이 음악이 뭐냐, 떨리고 궁금해서 촬영을 중단하고 두 시간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 찍을 수 있었습니다.”
단가 한 자락이 그를 바꿔놨다. 김씨는 채수정씨를 따라 소리꾼들의 모임에 찾아갔다. 전국 각지에서 소리하는 사람들이 지리산 근처에 모여 밤새 소리하며 즐기는 모임이었다. 거기서 그는 두번째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저는 그냥 좋아서 음악을 하는 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들어보니 소리꾼은 북을 이기려 하고, 북은 소리를 이기려 하고 …, 칼만 안 들었지 치열한 승부인 거예요. 모임이 열리는 숙소 종업원분들이 일 마치고선 피곤할 텐데 잠도 안 자고 그분들 소리를 들으며 추임새 넣는 그런 놀라운 모습을 보면서 이런 게 국악이구나 알게 된 거죠. 그래서 바로 녹음기를 사러 갔습니다.”
-녹음기요?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 음악을 누군가는 기록해야겠다, 저분들이 나중에 녹음한 자료가 필요하실 때가 있을지 모르니 최상의 품질로 녹음해 제가 들은 값을 하자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래서 수소문해 제일 좋다는 걸 샀는데, 그때는 그게 그렇게 좋은 것인지 몰랐어요. 마이크에 이것저것 해서 1억원쯤 들었는데, 나중에 보니 우리나라에 세 대밖에 없더라구요.”
-녹음에서 시작해 결국 음반사까지 차리게 된 거군요? “음반사는 저도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었어요. 이전 녹음 기록들을 찾아보니 뜻밖에 거의 없었습니다. <뿌리깊은 나무> 한창기 사장이 발행한 판소리 음반들이 거의 유일했어요. 그래서 더욱 녹음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녹음을 전혀 몰라 외국에서 열리는 녹음 워크숍까지 찾아다니며 공부를 했습니다. 다들 ‘저 녀석 미쳤다’며 말리고 그랬죠.”(웃음)
김씨는 8년 동안 300여개의 녹음원본을 만들었다. 노래 모임이 열리면 두메산골이라도 갔고, 어떤 촌로가 소리 좋다는 소리를 들으면 녹음장비를 싸들고 찾아갔다. 한번 가면 괜찮은 소리가 나올 때까지 며칠씩 머물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고, 제가 사진 찍고, 전문가에게 자료를 받아 굴지의 레코드사를 찾아갔어요. 여기 모든 걸 다 해놨으니 그냥 음반만 내주시면 된다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이사란 분이 충격적인 말을 하는 겁니다. 당신 한두 개도 아니고 원본을 300개씩 가져와서 잘 팔리지도 않는 국악 음반을 만들자니 미친 거 아니냐, 지금 우리를 약올리냐, 그래요. 다른 회사들도 정중은 했지만 모두 거절했죠.
그래서 큰 실의에 빠졌어요. 독립음반사를 만들까 했는데 인디레이블은 유통이 잘 안 되잖아요. 레이블을 달아줄 데는 안 한다고 하고 …. 한참 고민하다 비장한 각오를 했어요. 국악이란 다리를 건너가면 다시는 건너오지 못할 거다, 목숨 바꿀 심산으로 만들자, 그래서 2006년에 악당이반을 차렸습니다.”
-가족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아내에게 설명을 했습니다. ‘이 회사는 만들자마자 자본 잠식과 적자가 뻔하다, 그러니 내 모든 여력을 이 회사와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요. 아내는 ‘식구들 밥 굶기진 마라’고 한마디만 했습니다.”
-지금까지 음반은 몇 장 냈고, 얼마나 팔렸습니까? “40여종을 냈는데, 아직 200장 넘긴 건 없습니다. 스무장 팔린 것도 있습니다.”
-그럼 한푼도 못 벌었다는 이야기네요? 그 돈을 다 어떻게 메우고 있습니까? “제가 후배 10명하고 영상사진 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 매출액의 10%를 떼어 국악에 쓰자, 이걸 동의 못하면 같이 일 못한다고 못박았습니다.”
-순이익이 아니라 매출액의 10%요? “네. 다행히 다들 이해해줬습니다. 그래서 1년에 몇억원 정도를 그렇게 마련하고, 나머지는 제가 버는 돈을 털어넣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국악 공연과 음반을 모두 하는 회사가 저희뿐입니다. 공연사는 해도 음반사는 아무도 안 하려고 해요.”
-한옥에서 국악 듣기 운동을 펼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서양 악기들은 큰 공연장용이거나 행사용으로 만든 것들입니다. 우리 국악기는 민간 풍류용이었고 공연장은 한옥의 대청마루였습니다. 한옥이 자기 자리인데, 요즘은 그걸 버리고 서양식 공연장에서 국악을 연주합니다. 공연장은 크고 소리는 작으니 전기 증폭을 하는데, 소리란 게 전기를 맞으면 버리거든요. 그렇다고 서양식 무대를 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한옥에서 국악을 향유하는 것도 함께 하자는 겁니다. 서양 공연장에서 국악을 들을 때 졸았던 분들도 한옥에서 국악을 들으면 생각이 완전히 바뀝니다. 한옥에서 울리는 음악은 그 어떤 첨단 스튜디오에서도 못 만드는 성음입니다. 전국에 산재한 한옥들이 제겐 아름다운 스튜디오로 보입니다.”
-확실하게 인생을 쏟아부을 대상이 있어 행복하겠습니다. “제 삶의 모든 것을 바꾸어서 행복한 곳으로 이끌어주는 것이 ‘산조’라는 음악입니다. 국악은 옛날 것이고 지루하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 산조는 완벽한 현대음악이에요. 서양에선 작곡가가 평생 여러 가지 음악을 만듭니다. 그런데 산조는 평생 딱 한 곡 만들고 죽는 음악입니다. 인생 전체를 산조에 담습니다. 연주자 역시 산조 하나만 평생 해서 그걸 잘 연주해도 최고로 인정을 받아요. 최고의 음향 기술로 산조 전집을 만드는 것이 제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야금만 한 100장 될 텐데 10년 잡고 가야금부터 할 겁니다. 그 꿈을 꼭 이루고 죽고 싶어요. 그전에 안 죽는 것도 꿈입니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한겨레 2009.0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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