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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窓)/-. 혼란한 世上

신당 대선후보 정동영 확정

 


정 후보는 지역 선거인단 투표에서 13만996표를 획득해 8만1천243표를 얻은 손 후보와 5만4천628표를 기록한 이 후보에 승리했고, 여론조사 환산 득표수에서는 2만1천859표(44.06%)를 얻어 손 후보(1만7천525표, 35.3%)와 이 후보(1만216표, 20.60%)를 앞섰다.

 

정 후보는 그러나 휴대전화 투표에서는 6만2천138표를 확보, 7만31표를 기록한 손 전 지사에 뒤져 모두 3차례 실시된 모바일 투표에서는 한번도 1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이 전 총리는 4만5천284표를 얻는 데 그쳤다.

이로써 지난달 15일 제주.울산을 시작으로 한달간 진행된 신당 경선전은 막을 내리고 신당은 본격적인 대선체제로 전환하게 됐다.

또 신당 대선후보가 확정됨에 따라 정 후보와 민주당 대선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이인제(李仁濟) 후보, 범여권 `장외후보'로 독자행보를 펼치고 있는 문국현(文國現) 후보간의 `범여권 후보 단일화' 논의도 조만간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정 후보는 이날 후보 수락연설에서 "창당후 지난 두달, 우리는 서로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 과정에서 상처도 생겼고 분열도 생겼다"면서 "그러나 이제 치유와 통합으로 가야 한다. 하나가 될 때만 승리의 가능성이 생겨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 온 몸을 던져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 이어 새로운 `통합의 정부'를 만들어내자"면서 "역사는 대한민국에 산업화 30년과 민주화 20년을 뛰어넘어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면서 "국민의 답답함을 확 뚫어주는 큰 변화를, 국민 모두가 간절히 원하는 대변화를 만들어내겠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  2007-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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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스타 TV앵커서 정계입문 12년만에 대권 도전

 

DJ권유로 총선출마 전국 최다득표
정풍으로 뜨고 노인폄하로 큰 고비
北개성공단 성공적인 정착 이끌어

◆신당 대선후보 정동영 선출◆

1996년 정계입문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한 정동영 후보.
"(피켓에) 다음 대통령은 `정몽준`이라고 썼는데 너무 속도 위반하지 말라…. 정동영 최고위원도 있다."

2002년 대선을 하루 앞둔 12월 18일 마지막 명동유세에서 당시 노무현 후보는 정동영 의원을 차차기 대통령으로 점찍었다.

시계추가 다섯 바퀴 돌아 정동영 후보는 대통령감이라는`딱지`를 떼고 마침내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와 맞대결을 펼칠 대통합민주신당 공식후보로 선출됐다.

2002년 당시 노무현 후보와 함께 끝까지 경선판을 지킨 `경선지킴이` `몽골기병론`을 앞세워 17대 총선 과반 의석을 이끌어낸 주역, 통일부 장관으로서 `9ㆍ19남북공동성명`을 일궈낸 `개성동영`.

1996년 정치 입문 이래 불과 12년 만에 대선에 두 차례 출사표를 던질 만큼 `비단길`을 걸어온 그의 정치적 궤적은 이제 17대 대선을 정조준하고 있다.

◆ `정풍운동의 핵`

= 김한길 의원 표현을 빌리면 김대중 전 대통령 손에 이끌려 `얼굴마담`으로 정계에 입문한 정 후보는 1996년 4월 총선 전주 덕진구에서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 경력을 쌓아갔다.

2000년 재선 국회의원이 된 데 이어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서 5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던 정 후보는 이때부터 대통령감으로 거론되기 시작한다. 승승장구하던 그해 12월 당시 정권 최고 실세 권노갑 최고위원을 겨냥해 `2선 퇴진`을 요구하는 정풍운동을 주도해 정국의 `핵`으로 떠올랐다. 정치 입문 후 가장 큰 시련의 시기였지만 정 후보는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결국 권 최고위원은 10여 일 뒤 자진 사퇴했다. `정동영`을 전 국민의 뇌리에 각인시킨 정치적 사건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을 시작으로 불붙은 정치개혁의 신호탄을 받아든 정 후보는 2003년 11월 새천년민주당을 나와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2004년 4ㆍ15 총선을 앞두고 선거를 진두지휘하는 당의장이었던 그는 `노인 폄하 발언` 파문으로 또다시 정치적 고비를 맞았다.

◆ `재봉틀 아들 어버이날 울다`

= 정 후보 부친은 전북 도의원을 지낸 정진철 씨. 전쟁통에 네 명의 형을 잃고 졸지에 종손이 된 정 후보는 그 뒤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마저 먼저 떠나보내고 홀어머니와 함께 동생 세 명을 책임지는 가장이 됐다.

어머니 이형옥 씨는 상경해 손수 재봉틀을 돌리는 봉제일로 서울대에 입학한 정 후보를 뒷바라지했다. 말쑥한 외모와 달리 혹독한 가난을 경험했던 정 후보는 2005년 5월 4일 83세 노모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냈다. "어머님 가슴에 다시는 카네이션을 달아드릴 수 없다는 사실이 저를 목메게 합니다."

어버이날을 불과 나흘 앞둔 날 인생의 버팀목을 잃은 그가 손수 써내려간 눈물의 사모곡이다.

◆ `개성에서 용난다`

= 2002년 대선은 그에게 시련이자 행운이었다. 8주간 꿋꿋이 경선을 완주해 후보들의 잇단 사퇴로 흔들리던 경선판을 지켜낸 정 후보는 국민참여운동본부장으로서 `돼지저금통`을 들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기어이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어냈다.

차기 대통령감으로 주목받던 정 후보는 2004년 7월 통일부 장관으로 입각하면서 평소 품었던 남북관계 청사진을 완성해갔다. 특히 설계도뿐이던 허허벌판 개성공단을 남북관계 해빙의 `상징`인 현재 모습으로 키워낸 주인공이다. 이산가족 화상상봉 을 잇달아 성사시키며 그에게 `평화대통령`이 투영되기 시작했다.

대기업 최고경영자 출신 이명박 후보에 맞서 중산층과 중소기업 편에 선 `중통령`으로, 이 후보의 청계천과 대적하는 `개성동영`으로 이제 그 꿈에 성큼 다가섰다.

매일경제  2007.10.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