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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Life(삶)/-. 人生流轉

3. 어느 사형수의 모정불심(母情佛心)

死刑囚 자식을 둔 모친께서  자식을 잘못 가르친 에미의 죄라며 자식이 있는 교도소 담옆에 방을 얻어 2년6개월간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제일 먼저인  1번 면회를 하고, 자식이 추운 감방에서 지낸다고 칠순노인이 한 겨울임에도 연탄불도 넣지 않는 냉방에서 고통을 감내해 낸 母情앞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자가 있을까?

모정불심으로 살아난 사형수 양동수의 참회록 "어머니의 등불을 가슴에 걸고" 을 읽었다.

 

1950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난 양동수 법사(교도소 수감중 불교통신대학과정을 이수하고 법사 자격증 취득)는 트럭운전사 생활을 하던 26세때인 1975년 12월 24일 저녁에 친구와 못 마시는 술을 마시고 누나집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바로 옆집으로 들어 갔는데 여자 두명만이 집을 지키고 있다가 술취한 남자가 들어오자 놀라 소리를 지르자 얼떨결에 운전을 하다가 과일을 깍아 먹느라 잠바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칼을 꺼내 위협했으나 계속 소리를 지르자 두명의 여자를 칼로 찔렀는데 칼에 찔려 절명한 여자는 14세의 어린 소녀였다.
모친께서은 못마시는 음주와 어릴때 뇌를 다친 적이 있다는 정신감정까지 의뢰하며 구명을 하려 했지만 결국 양동수씨는 대법원에서까지 사형선고를 받고 기다리던 중 삼중스님을 소개 받아 불교에 귀의하고 모친의 지극정성에 감동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감형으로 무기수로 감형되어 수형생활을 해오다가 1996년 2월에 모범수로 21년만에 가석방되었다.

연로하신 몸으로 막내자식을 위해 온몸을 던졌던 모친께서는 자유로운 세상에서 막내자식과 하룻밤이라도 잤으면 하는 한(恨) 많은 소원을 이루지 못한채 가석방 4년전인 1992년 87세로 별세하였는데 마지막 가시는 길에서도 사형수 아들이 감옥에 가기전에 사용했던 선글라스와 운전면허증,인감도장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미물들에 대한 마지막 보시로 죽으면 육신은 화장을 해서 그 뼛가루에 꿀과 밥을 발라서 산천에 뿌려 달라고 하셨단다.

 

양 법사의 참회록을 통해서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고 일반 사회와는 격리된 교도소 사회의 일면을 엿볼 수 있었으며, 특히 사형수들의 경우 법원의 선고가 있으면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참회하며 억울하게 죽은 死者를 위해 기도하고 종교에 귀의하여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는데 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거나 교수형에 집행되기 직전까지도 자신에게 선고된 죄과에 대하여 끝까지 억울하다며 항변하는 죄수들의 경우에는 수사내용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는 양법사의 주장은 충분히 참고할만한 가치가 있는 듯 하다.

 

모친의 자식에 대한 책임과 한 없는 사랑이 한 사형수를 갱생의 길로 인도하고 본인 또한 가석방되어 제2의 삶으로 남은 여생을 노인들의 복지 등 좋은 일에 열중하는 것이 자신의 죄과를 조금이라도 만회하는 것이며 돌아가신 모친에 대한 보답으로 생각하며 살겠다니 앞날에 축복이 있길 기원해 본다.

가슴 찡한 감동과 함께 그동안의 나의 가족과 내 자신에 대한 회고와 사랑을 다짐해 보는 기회로 소중히 간직하며 삶의 교훈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농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