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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Life(삶)/-. 人生流轉

15. 잠들지 않는 남도- 제주4.3항쟁

 

고등학교때까지 틀에 밖힌 주입식 교육을 받으며 국사책에서도 거의 언급되지 않았던 제주4.3항쟁에 관한 현대사 최악의 사건을 나는 서슬퍼런 포악한 군부독재가 활개를 치던 1980년대 언젠가 모교의 대학교지를 통해 처음으로 접하여 일부나마 알게 되면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고 이후 4.3항쟁과 관련된 글들이나 언론 보도등을 볼때는 좀더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었다.

 

민주주의 국가라는 미군정(美軍政)시기인 1948년 4월3일 새벽1시에 민중봉기의 첫 횃불이 올라간후 1949년 3월까지 제주도를 한국판 킬링필드로 만든 장본인들이 다름아닌 같은 우리민족이었다는 점에 더욱 분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30여만명 남짓했던 제주도민중에 희생인원은 적게는 2~3만에서 많게는 10만명까지로 추산되는 엄청난 희생과 비극이 아직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있는데 대하여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변명해야 할까.

 

마침 오늘 4.3항쟁희생자위령제을 맞아 노무현대통령이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위령제행사장을 방문하여 국가권력에 의하여 저질러진 과오는 국가가 책임지고 정리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하니 만시지탄(晩時之歎)의 감은 있으나 그나마 다행이라고 본다.

 

우리는 해방후 국가권력에 의하여 저질러진 수많은 민중들의 수난과 고통,희생의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빨갱이들의 짓이라고 치부했는가 하면 좌우대립과정의 희생양으로 평가절하하며 소외시켜 왔던 것이 그동안 권력과 일부 학계들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이제 정부나 관련 학계에서는 아직도 제대로 규명되고 있지 않는 많은 역사적사건들을 21세기를 사는 국민들에게 더이상 덮어 두고 방치하는 방임의 우(愚)를 범하지 말고 양지로 끌어내어 다시는 반복되는 통한(痛恨)의 역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무고한 민중들이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룬 제주4.3항쟁의 진상이 하루빨리 밝혀지고 희생자들의 유골발굴작업도 보다 활발히 추진하여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명예회복은 물론 적절한 보상과 또한 희생된 원혼들을 위로할 수 있는 방도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제주4.3항쟁에 대하여 그동안 역대 정권들이나 일부 극우 학계에서는 좌익세력들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고 당시 정권은 공산주의 세력으로 부터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요 희생이었다고 강변해 왔었다.

그러나 이보다는 부푼 기대속에 일제의 폭압을 벗어난 해방정국을 맞아  좋은 세상을 기대했던 민초들에게는  꼬리를 감추고 사라져도 속이 시원찮을 친일파들이 오히려 활개를 치며 이들과 결탁한 우익청년단체들의 폭력에 누적된 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고, 이들를 주도한 세력은 물론 사회주의 사상(그동안 역대 정권들이나 일부 우익학계에서는 빨갱이,좌경세력, 공산주의자들로 매도)을 가진 당시의 지식인 계층이었다.

그 대표적인 핵심인물이 이덕구이다.

그는 제주 조천읍 태생으로 일제시대 일본에서 대학공부를 하고 해방직전 일본군에 학병으로 끌려 갔다가 해방과 함께 제대후 고향으로 돌아와 조천중학 교사로 재직했었다.

 

제주도는 지역적 특성으로 자치적 공동체 의식이 다른 지역에 비해 보다 강했고,일제시대부터 계속된 민족해방운동의 전통, 그리고 해방후 속속 집결한 민족세력의 영향력 등으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등이 일찍 결성되고 1946년까지 제주전역에 대한 통제력을 장악하기도 했었다.

이런 가운데 도내 민주,민족세력의 영향력이 커져가자 미군정당국은 서북청년단 등 극우세력단체들을 적극 지원함과 동시에 경찰력과 경비대등을 증파하는 등 힘을 비축하기 시작하며 비극의 싹이 태동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급기야 1947년 3.1절 기념식장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경찰의 발포로 여러명이 숨지고 검거와 투옥의 광풍이 불기 시작하자 미군정과 극우세력들에 대한 반감이 불길 번지듯 퍼져 갔고 당시 합법정당이던 남로당이 오히려 도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결국 경찰과 극우세력들의 폭압이 심해지자 도민의 지지를 받고 있던  남로당은 급격하게 무장투쟁으로 돌입해 관공서 습격과 파괴 등 간헐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하게 되고 1948년 4월3일 새벽 1시를 기해 제주도 전역에서 무장봉기의 횃불을 올리고 비극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제주 조천중학교 교사였던 이덕구는 남로당 간부회의 중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후 한라산으로 입산했고, 제주4.3항쟁이 시작된 후 무장투쟁을 위해 조직된 인민유격대3.1지대장을 맡았으며 후에 인민유격대총사령관으로 4.3항쟁의 최고 핵심인물이 되었다.

정부의 제주도 비상계엄령선포와 함께 초토화 작전이 시작된 상황에서 인민유격대를 이끌던 이덕구는 당시 현상금 6백만원이 걸려 있었는데 그의 최후는 1949년6월 어느날 경찰과 교전중 사살되었다는 설과 자살했다는 주장등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민주주주를 표방하며 남한만의 단선정부 구성을 위해 전년도에 5.10총선거를 치루어 헌법이 제정되고 정부를 수립한 이승만정권은 인민유격대장 이덕구의 시신과 그의 가족들을 어떻게 처리 했던가.

 

이덕구의 시신은 산에서 내려올  당시 일본군 비행복에 군화차림이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과는 달리 그의 초라한 형색을 강조하기 위해 고무신과 남루한 옷차림에 주머니에는 수저가 꽂혀 있었고 입가에 피를 흘리며 헝클어진 머리로 제주읍내 한복판인 제주경찰서 앞 관덕정 광장에 십자형 나무틀에 묶인채 반란의 두목이 어떻게 최후를 맞는지를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한 이덕구 시체 전시가 여러날 계속되었고, 다시 효수(梟首)되어 전봇대에 걸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덕구의 가족인 부인과 5살짜리 아들,2살짜리 딸 등 어린 자식들까지도 모두 경찰에 살해 되었음은 물론, 형들의 부인과 자식들 심지어 사촌동생들까지 경찰에 의해 살해 되는 비극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일자무식이었던 농민이 유격대가 뿌린 삐라로 담배를 말아 피웠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몰려 부인이 보는 앞에서 동네어귀로 끌려나가 살해되기도 했던 정말 어처구니 없었던 사건이나 몇년전 모방송에서도 보도한 공포에 쫓겨 피신한 동굴을 봉쇄하고 부녀자와 어린이들까지 질식사시킨 다랑쉬동굴사건 등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현대사의 비극 4.3항쟁의 진실이 하루빨리 규명되어 명예회복과 보상등 적절한 조치가 강구되길 기원하며 정부당국의 해결의지를  촉구해 본다. 

 

 

 

@농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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