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신문이나 TV를 보면 답답하다.
온통 월드컵 관련 기사와 뉴스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평택기지 시위, 북한 핵문제, 한ㆍ미 FTA 협상, 겨울 에너지 대책 등 굵직한 현안에 관한 논의가 월드컵 열풍에 가려지고 있다.
지난 2002년 한국의 월드컵 4강신화 창조 이후 월드컵은 우리에게 신성불가침한(?) 것이 되어 버린 느낌이다. 건전한 비판도 왕따의 대상이니 말이다.
한ㆍ일월드컵 이후 한국 위상이 국제사회에서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우리 정부의 정통성이나 국민의 자긍심이 커졌다는 데 이의를 달기 어렵다.
그렇다고 월드컵 4강이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는 아니다.
참여정부 들어 겪어온 여러 가지 종류의 사회 갈등이 말해주듯 우리는 청산해야 될 과거의 잔재나 건설해야 할 미래의 과제가 산적해 있다.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있다면 브라질에는 펠레가 있다"는 얘기가 있다.
축구의 세계적 인기를 짐작케 한다.
축구가 대중을 열광케 하는 이유는 단순성에 있다.
축구는 하거나 보거나 규칙, 장비, 기술, 전술 등이 간단하다.
경기가 공격적으로 빠르게 이루어져 관중들의 감정이입과 표출이 쉽다.
특히 약자도 강자를 물리침으로써 보상효과가 크다.
월드컵은 최대 국제적 메가이벤트(mega-event)다.
올림픽이 불과 두 주 동안 치러지는 잡다한 품목을 내건 슈퍼마켓이라면, 월드컵은 단일 품목으로 무려 한 달 동안 열리는 전문백화점 같은 것이다.
실제로 광고 수입, 후원 회사, 상품 판매, 관중 동원, 입장권 수입 등에서 월드컵은 다른 국제 체전을 압도한다.
관중스포츠(spectator sports)로서 월드컵만한 것이 없다.
TV가 축구의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스타를 만들어 내고, 이를 통해 연출되는 인간드라마는 사람들에게 흥분과 감격을 주면서 후원 회사의 이미지를 강하게 각인시켜 준다.
세계 모든 나라는 월드컵 본선에 참여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월드컵 본선에 나가느냐 못 나가느냐는 단순히 국가적 자존심의 문제를 넘어 있다.
나라마다 갈등을 봉합하거나 통합을 도모하기 위해 월드컵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월드컵은 잘 활용하면 보약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편이다.
국민 동원에 관해 축구만한 스포츠가 없다.
선ㆍ후진국을 막론하고 축구가 대중 불만을 희석하거나 사회 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자주 편용되는 이유다.
오늘날 세계 축구계를 양분한 유럽과 중남미를 보라.
유럽에서 축구가 사회통합을 위해 기여해 왔다면, 중남미에서 축구는 갈등봉합을 위해 이용되기도 했다.
인종적 통합에 기여한 1998년 프랑스월드컵, 양민학살을 호도하는 데 악용된 1978년 아르헨티나월드컵이 좋은 보기다.
우리의 경우 흥미로운 대상은 '붉은 악마'들이다.
이들은 이탈리아의 '울트라스'나 남미의 '바라스 브라바스'와는 달리 한국적 정체성을 갖는 축구서포터 문화를 만들어냈다.
길거리 응원을 통해 체면ㆍ형식ㆍ권위 대신 열정ㆍ소통ㆍ포용을 우리 사회에 가꿔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기주의와 냉소주의로 가득한 한국 사회에 더불어 사는 공동체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 셈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군중심리를 자극하는 동안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대중마취의 대상이 되었다는 역설 또한 중요하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 한ㆍ일월드컵 때만 해도 우리는 상업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려는 의지를 지녔다.
우리 땅에서 치러져서 그런지 몰라도 월드컵을 기업의 장사판이나 국력의 경연장을 넘어서는 문화축제로 만들자는 최소한의 공감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모두 국가라는 상징 아래 우리 팀을 응원하고, 기업이 마케팅을 위해 만든 광고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스포츠는 주요한 문화자본이다.
특히 월드컵은 권력 용도와 상품가치가 빼어나다.
정치나 기업이 관심을 갖는 이유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대중에게 가장 사랑받는 축구가 지나치게 정치화되고 상업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월드컵을 통해 차이와 차별의 장벽을 허무는 계몽과 성찰의 기회를 가질 필요가 있다.
인종과 계급의 장벽을 넘어 "지고의 경기를 위하여"라는 월드컵의 줄 리메(Jules Rimet) 정신을 살려 국수주의, 상업주의, 인종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임현진 서울대 기초교육원장ㆍ사회학과 교수]
매일경제 [매경의 窓] 2006.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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