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다리'의 미스터리를 풀어보는 재미 |
무한한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덜' 밝혀진 유물이 '더' 찾아 가 볼 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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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원(ernesto)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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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료가 많아 이의가 없는 역사적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것이 아닌, 답사하는 이들에게 무한한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덜' 밝혀진 유물이 '더' 찾아가 볼 만합니다. 지난 주말 꼭 그렇게 베일에 가려진 유물을 만나고 왔습니다. 충북 진천 땅 농교(籠橋·농다리)가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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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금천(洗錦川)을 가로질러 놓인 진천 농교의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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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서부원 |
| 넓든 좁든 개울을 가로질러 쌓아놓은 생활 유물로 '다리'는 답사하는 이들이 쉽게 만날 수 있는 비교적 흔한 문화재입니다. 주변과 절묘하게 어울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선암사를 대표하는 무지개다리(홍교)는 건축학의 우수성에 기인한 까닭인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제법 많이 남아 있고, 충청도 강경과 논산, 전라도의 나주 등지에는 자연석을 평평하게 다듬어 교각 사이에 걸쳐놓은 돌다리가 몇 백 년을 버텨내고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돌다리는 무지개다리에 비해서 드문 경우에 속합니다.
반원형의 무지개 다리든, 밋밋한 돌다리든 대개 조성 연대와 이유가 제법 분명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관련 사료가 많이 남아 있거나, 건축학적 공통점이 많아 역사적 유추가 가능한 까닭입니다.
그런데 진천 농교의 경우는 조성에 관한 '이렇다'할 사료가 없습니다. 전설과 같은 신비로운 이야기만 넘쳐날 뿐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이와 유사한 다른 예가 전혀 없을 만큼 조성 기법과 양식이 독특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더 큰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고려 고종 때 최씨 무신정권의 뒤를 이어 잠시 권력을 움켜쥐었던 임연(林衍)이 자신의 고향 마을에 놓은 것이라고도 하고, 신라 때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이 이곳에서 고구려와의 격전 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놓은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농교 조성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 모두 이 고장이 배출한 인물을 연계시켜 의미를 부풀린 전설로 역사적 사실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 할 것 같습니다.
농교라는 이름도 특이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리 이름 앞에 붙여진 '농(籠)'이라는 글자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밟으면 움직이고 잡아당기면 돌아가는 돌이라는 뜻에서 이름이 지어졌다지만 '농(籠)'이라는 한자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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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의 무게 탓인지 꿈틀대는 뱀 마냥 휜 농교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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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서부원 |
| 여느 것과는 달리, 이 다리는 주변의 돌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튼실하게 쌓아 교각으로 삼았고, 세월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세울 때부터 의도한 것인지 일직선이 아닌 벌레가 꿈틀대듯 곡선 모양이어서 자연스러움이 살아 있습니다.
사용한 자연석은 붉은 빛이 감도는 검은 돌로, 주변을 둘러보니 대개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인지 주변 울창한 숲의 초록빛이 유난히 도드라지게 보입니다. 진천 사람들이 이 고장의 빼어난 경치를 '상산팔경(常山八景)'으로 묶어냈는데, 그 중 농교 위에 눈이 쌓일 때의 정경을 말하는 '농암모설(籠巖暮雪)'도 따지고 보면 검은 돌 위의 흰 눈의 선명한 도드라짐 때문일 겁니다.
건너다보면 시선을 끄는 점이 꽤나 많습니다. 옆에서 보면 사다리꼴 모양의 돌무지 교각이 위에서 보면 길쭉한 타원형입니다. 빠른 물살로 인해 받게 되는 저항을 분산시키기 위한 배려입니다. 아마도 이런 배려가 그 오랜 세월 동안 허물어지지 않고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일 겁니다.
그런데, 튼실한 교각에 비해 상판의 폭이 겨우 한 사람이 간신히 딛고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좁습니다. 넓게 잡아도 60cm는 넘지 않아 보입니다. 말하자면, 다리로서의 활용도가 매우 낮은 편입니다. 두 바퀴 달린 수레는커녕 두 사람이 나란히 지나갈 수도 없을 만큼 비좁은 돌을 상판으로 쓴 이유가 궁금합니다.
무지개다리는 물론, 여느 돌다리의 경우는 수레 두 대 정도는 너끈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게 조성되었는데, 왜 유독 이 농교는 H자(위에서 보았을 때)형으로 유별나게(?) 만든 것일까 하는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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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살의 저항을 분산시키기 위해 둥그렇게 쌓아올린 교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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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서부원 |
| 수레가 지날 수 없는 이 다리는, 따지고 보면 상판이 필요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교각과 교각 사이의 폭이 70∼80cm 정도이니 웬만한 아이들이라도 징검다리 삼아 사뿐히 뛰며 건널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사람과 물자를 지나다니게 하는 다리 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목적을 지닌 것은 아닐까 의문을 가져보았습니다. 주변 지형을 감안하더라도 이 다리가 진천 땅과 이웃한 증평, 청주 사이의 주요 길목이라고 보기에는 어색합니다. 하천-세금천(洗錦川)-을 따라 평지로 길을 내지 않고, 양쪽으로 산이 맞서 있는 곳을 교통로로 활용했을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멀리 떨어져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내륙 지방에서는 보기 드물게 너른 들녘을 끼고 있는 진천 땅의 유용한 수리 시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어른이 선 채 교각과 교각 사이의 다리 아래로 지날 수 있을 만큼 하천 바닥이 낮았다고 하니, 이를 막아 '가둘' 수 있었다면 쓸만한 보(洑)의 기능은 했을 것입니다.
다리 이름의 첫 글자인 '농(籠)'이 새장이라는 뜻과 함께, 싸거나 가두다는 의미를 지닌 글자이니, 관련지어 이해해 보면 그리 허무맹랑한 유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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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튼실한 교각에 비해 돌 하나만 달랑 얹혀진 비좁은 상판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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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서부원 |
| 지금의 다리 높이는 어린 아이의 키보다도 낮습니다. 하천의 바닥에 세월의 무게 마냥 토사가 쌓인 탓입니다. 그 아래 부분을 들춰내 볼 수도 없고, 현재 드러난 교각 주변에도 물의 흐름을 막았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워 -있었다손 치더라도- 다리 외의 기능을 알아내기란 어렵습니다. 다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궁금증에 대해 스스로 답변을 궁리하다보면 예나 지금이나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놓여 있는 농교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아 답사의 재미를 배가합니다.
지금도 진천 농교에 대해 '더' 밝혀내기 위해 연구에 몰두하는 전문가들이 많을 겁니다. 그러나, 저 같은 얼치기 답사객으로서는 -무한한 호기심을 제어하게 될지도 모르기에-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을(?) 뿐더러 농교 역시 자신을 '덜' 드러내 보여주고 살짝 감춤으로써 더욱 더 답사객의 애탄 발길을 끌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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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12 오후 7:44 |
ⓒ 2004 OhmyNews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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