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 없는 항일언론인 신채호의 삶과 혼
서거 70년, 단재는 편히 잠들었을까 |
▲ 단재 신채호 선생. | |
ⓒ 이덕남 |
1910년 3월 같은 자리에서 안중근 의사가 사형된 지 26년 만에 같은 길을 떠난 단재 신채호 선생은 사학자이자 언론인, 그리고 문학, 철학,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선구적인 활동을 해온 독립 운동가였지만 서거한 지 7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한국 국적이나 호적조차 갖지 못한 상태다.
2005년 여름 <단재 신채호 평전>을 낸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은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 E.H. 카의 <과거와 현재의 대화>는 인용하면서 단재의 <아(我)와 비아(非我)와의 대결>은 외면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고 통탄했다. 실제로 젊은 사람들도 남미의 혁명 전사 체 게바라는 표상화 하지만 단재에 대해서는 무감한 것이 현실이다.
사실 단재는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100년 전에 통감했던 인물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훼손되는 고구려사는 만약 단재가 없었다면 훨씬 초라했을 것이며, 최근 재평가 받고 있는 '의열단'의 투쟁도 단재의 '조선혁명선언'이 없었다면 훨씬 초라했을 것이다.
올해는 단재 선생이 서거한 지 7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지만 그가 베델이 주도한 <대한매일신보>에서 언론생활을 시작한 지 100년째 되는 해이기도 하다.
▲ 안중근 의사와 단재 선생이 목숨을 잃은 뤼순 감옥. |
ⓒ 조창완 |
체 게바라는 알아도 단재 신채호는 모른다?
1880년 11월 7일 충남 대덕군
정생면에서 태어난 단재 선생은 10세에 행시(行詩)를 짓고, 13세에 사서삼경을 독파한 신동이었다. 그는 1905년에는 성균관의 박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 해 을사늑약이 일어나고 민영환이 자결한 데 이어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면서 그는 이듬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어 언론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후 그의 모든 활동은 국체의 유지에 맞춰졌다.
하지만 1910년, '경술국치'에 이르자 칭다오(靑島)를 경유해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이후 감옥에서 서거할
때까지 그곳에서 신문발행, 의열단 활동 지원 등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 백탑사 맞은 편 진스팡지에 21호는 신채호 선생이 1920년 결혼 후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곳이다. 이 건물도 92년에 증축했고, 1~2년 안에 완전히 철거될 예정이다. |
ⓒ 조창완 |
단재는 포괄적인 지식으로 당대의 독립 운동을 정확히 파악했다. 초반기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펼치며 나라의 운명을
미국 등에 맡기겠다는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서'를 철저히 반대하는 등 역사가 흘러갈 방향에 대해서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대신 그는
무장독립 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는 한편 김원봉의 '의열단'에 방향지침서인 '대한독립선언'을 써주며 사상의 방향을 인도했다.
단재는 일찌감치 고구려 등 상고사에 대한 정리를 확실히 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신라 김유신이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당나라를 끌어들임으로써 단군 이래 일궈온 민족 터전의 4분의 3을 잃게 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신라가 통일 후 고구려 땅 수복 노력을 게을리 한
점을 강조하며 이런 관점을 고착화하는 데 일조한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는 단군 이래 융성한 민족사학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는 동북공정을 앞세운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단재 사상에 대한 연구는 미미하기만 하다.
독립운동가 신채호의 국적은 여전히
'무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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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단재의 국적회복이나 호적문제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있다. 단재는 일제가 조선민사령을 제정해
조선인 호적을 장악하기 전에 중국으로 망명했기 때문에 호적상 무국적인이 된 후, 중국에서도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국적이
없는 상태다.
지난해 8월, (사)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 주최로 신채호 선생 국적회복을 위한 공정회를 개최해 단재를 비롯한
무국적자 신분의 독립유공자들의 국적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단재 선생을 비롯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사망한 독립유공자 예우를
위해 신기남 의원 등이 '무국적사망독립유공자의 국적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을 발의했지만 아직까지도 국회에 계류된 상태로만 남아있다. 이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온라인 상에서 수천명이 이에 지지하는 서명운동에 동참하기도 했으나 단재의 국적을 회복해주지는 못했다.
또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 안치됐던 단재 선생의 묘소도 98년 홍수 이후 붕괴된 이래 여러 우여곡절 끝에 가묘상태로 남아있다. 누추하기는 가묘로 남아있는
묘소뿐만이 아니다. 이런 어려움은 단재의 유족들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곤궁하게 이어져온 후손들의 삶
▲ 단재가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던 베이징대학의 웨이밍후와 급수탑. |
ⓒ 조창완 |
단재는 16살에 고향에서 결혼을 했지만 타국 행을 결정하면서 부인과 이별했다. 자칫 후손이 없을 뻔하다가 40세인
1920년 연경대학에 유학중이던 28살의 박자혜 여사와 재혼해 다음해 맏아들인 수범을 낳았다. 하지만 독립운동 중에 가족을 돌볼 겨를이 없어
부인과 아들은 고국으로 돌아갔다. 중간에 잠시 베이징에 왔을 때 둘째 두범을 얻었다.
하지만 독립운동 집안의 길이란 고난의
길이었다. 어려운 환경 때문에 1942년에 아들 두범씨가 사망했다. 수범씨는 19살에 한성상업학교 졸업 이후 돌아가신 아버지의 족적을 좇기 위해
북만주로 향했으나 그 사이 신수범 선생의 친구 집에서 셋방살이를 하던 박자혜 여사도 작고했다. 박 여사는 소식이 닿지 않아 도착하지 못한 아들이
오기도 전에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져 묘소도 없다.
이후 단재 후손의 삶은 여느 독립운동가의 가정처럼 어렵기 그지없었다. 특히
단재는 임시정부 초기 이승만의 정책에 반대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신수범 선생의 신변도 안전하지 않았다. 신 선생은 환국한 백범 김구 선생의
도움으로 몇 번의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이후 신수범 선생은 고철장사에 넝마주의, 부두 노동자를 전전하며 이승만 정권을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잠 자다가도 아버지 단재 선생의 이야기만 나오면 뛰어나갔다. 그러나 결국 그는 디스크와 심장판막으로 1991년 작고했다.
이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유족은 신수범 선생의 부인인 이덕남씨(62)와 그들의 자녀인 두 남매가 남았을 뿐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포괄적인 독서와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한 순간도 독립 의지를 잃지 않았던 민족의 혼이었다. 123년(한성순보를
기점으로) 한국 언론사에 단재 선생만큼 위대한 업적을 남긴 언론인은 없다. 또한 사학 연구에 있어서도 수많은 이들이 일제의 실증사학 등에 머물러
있을 때 당당하게 역사의 주체가 우리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뤼순감옥의 차가운 바닥에서 숨을 거둔 지 70년이 지난 지금 단재가
조국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갖고 있을지 궁금하다.
"국적도 없고, 묘도 제자리 못 찾고...며느리로서 피 토할 일" [인터뷰] 단재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씨
현재 단재 신채호 선생의 장남인 신수범씨의 부인 이덕남씨는 베이징에 있는 딸의 집에 머물면서 단재 선생의 자료
정리 및 기념사업을 하고 있다. 지난 10일, 베이징에서 이덕남씨를 만났다. |
2006-02-17 /조창완 기자
ⓒ 2006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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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근대사의 영웅 신채호
단재신채호선생은 고령신씨로, 시조는 고려때 문과에 급제하고 검교와 군기감의 벼슬을 지낸 신성용이다. 그 윗사람들은 신라의 공족(公族)으로 여러대에 걸쳐 고령에 살면서 호장(戶長)을 지내 왔기 때문에 고령신씨로 계승되어 왔다.
단재는 시조로부터는 26세 손이 되고, 조선조에 영의정까지 지낸 신숙주에게는 18대 손이
된다.
고령신씨의 일부는 연산군 무렵에 낭성과 가덕 지방에 낙향하여 상당산 동쪽에 살았으므로 산동대가로서
지칭되어왔으며, 낭성서 대과급제 24명, 진사 80여명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단재의 직계는 높은 벼슬과는 인연이 멀었다. 그의 16대조부터 12대조까지는 종 3품에서 종
6품에 이르는 벼슬에 있었으나 11대조부터 9대조까지는 족보상에조차 벼슬이 보이지 않으며, 8대조부터 6대조까지는 일시 벼슬이 주어지는 것
같다가 5대조부터는 다시 그 증직되는 벼슬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몰락하였다. 단지 조부 신성우가 문과에 합격하여 사간원의 정언의 벼슬을 거치고
있을 뿐이다.
단재
집안의 몰락에는 이인좌의 난과 관련되어있다. 이 난의 관계자중 신천영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단재의 직계는 아니고, 신숙주의 5대손인
신식의 5대손이라고 한다. 신식의 외손에 소현세자가 있는데 신식의 5대손인 신천영은 이인좌와 모의하여 반란을 꾀하고는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을
추대하려 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신식의 가문은 거의 몰락하였다. 그리고 이 여파는 낭성 일대에 미쳐, 단재의 5대조 신두모
등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급속하게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대원군의 집정기간동안 단재의 할아버지인 신성우가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의 정 6품 벼슬인 정언을
지냈을 뿐이다.
신성우의 벼슬길 이후에도 단재의 집안은 피지 못하여 그의 낙향과 함께 집안사정은 극심한 생활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신성우는 처가가 있는 안동권씨 마을로 외동아들인 신광식을 보내어 외가살이를 시키게
된다.
단재의 아버지 신광식은 가난한 시골 선비로, 본래 살던 충청북도 청원군 가덕면을 떠나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리미 마을 외가댁 옆에 간신히 묘막을 얻어 살아야 할 정도로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외가인 권씨촌 도리미에서 신광식은 부인 밀양박씨와의 사이에서 첫 아들 신재호를 낳았고, 서른 두 살이
되어서는 둘째아들 신채호(申寀浩) 낳았다. 이 이름은 나중에 채호(采浩)로 고쳐지는데 이 사람이 단재신채호선생이다. 선생의 아호 단재는 최영
장군의 단심가에서 따온 것이다.
형인 재호는 순흥안씨와의 사이에 향란이라는 딸을 두었는데, 단재 나이 13세때 세상을 뜨고 말았다. 단재는
중국망명시기 향란의 결혼문제와 관련하여 국내로 들어왔다가 혈연의 정을 끊기도 한다.
단재는 16세가 되던 해에 집안에서 정해준 풍양조씨와 결혼을 하여 첫아들 관일을 낳았으나 우유에 체해
아들을 잃고 난 후 부인과 이혼을 한다.
중국망명 중이던 1920년 단재는 박자혜와 두 번째 결혼을 하여 그 사이에 수범과 두범 두 아들을 낳는다.
박자혜는 1895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수유리(현 서울 도봉구 수유리 화계유치원자리)에서 태어나 1914년 숙명여학교 기예과(2회)를
졸업하고,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 조선총독부 부속병원(현 적십자병원)에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소위 '간우회사건'을 주동한 인물이었다.
당시 박자혜는 북경 연변대학에 재학중이었는데 단재와의 결혼은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성사되었다. 박자혜는 연경대학에서 여대생 축구팀을
구성하여 주장으로 활약할 만큼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1936년 단재가 여순감옥에서 서거한 이후 둘째 아들 두범은 1942년
영양실조로 사망하였고, 1944년 박자혜도 병사한다.
장남 수범은 단재의 국적취득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단재의 업적을 정리하는 작업에 온힘을 기울이다
1991년 5월 사망하였다.
당시 단재선생의 부모는 논마지기는 고사하고 밭조차 버젓한 것이 없었으니, 산간밭을 개간하여 보리와 콩, 옥수수 농사를 지어 허기를 메우는 지경이었다. 그것도 보릿고개에는 남아있는 식량이 거의 없어 산나물을 캐어 죽을 쑤어 먹어야했다.
단재의 할머니 외가가 있는 도리미 마을은 부근의 두 부락과 함께 어남리를 이루고 있는데, 계족산 봉우리들이
이어지는 사이의 삼태기 같은 깊은 골짜기에 군데군데 집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봉소골이라고도 불리웠는데 이것은
새둥지 같은 깊은 산 속에 삼태기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외딴 곳에 떨어진 마을의 전체 형편은 모두 비슷하였다.가난한 살림속에
성장한 터라 단재는 몸이 매우 허약하였으며, 병약하여 마음대로 활동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웠다.
할머니의 외가가 있는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태어난 단재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중에서도 단재에게 가장 커다란 고통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 신광식을 잃는 슬픔이었다. 항상 자신과 자신의 형 재호에게 큰 힘이
되어주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은 단재에게 큰 불행이었다.
신광식은 고향인 충북 청원군 낭성면 추정리 가래울 대왕산 후미진 곳에 묻혔다. 그리고 남은 식구들도 일가 친척들이 많이 모여살고
있는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돌아왔다.
식구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할아버지 신성우는 마을에서 서당을 열고 글을 가르치며 한편으로는 두 손주에게 본격적으로 한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단재선생의 재능은 이때부터 발휘하기 시작하였는데, 아홉 살에 중국역사인 '통감'을 통달하였고, 이후 삼국지와 수호지 등을
거침없이 읽어나갔다.
단재선생은 열살무렵 한시에도 특출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써레와 쟁기를 지고 나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다음과 같이 한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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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날리기를 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한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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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점차 학문의 정도가 성숙하게 되어가던 즈음에 단재선생에게는 또 하나의 슬픔이 닥쳐왔다. 항상
아버지처럼 단재선생을 따뜻하게 보살펴주던 형 재호가 단재의 나이 13세때 세상을 뜬 것이다.
16세가
되던 해에 단재는 주위의 권유에 의하여 풍양조씨를 아내로 맞이하여 혼인을 한다.
17세에는 진사를 지낸 신승구의 집에서, 19세에는 목천의 신기선의 사저를 드나들면서 한학을 익힌 단재는
드디어 신기선의 추천으로 19세에 성균관에 입교하게 된다.
성균관에 입교한 단재는 이종원, 이남규 아래에서 수학을 하며 훗날 이름을 날리는 변영만, 김연성, 유인식,
조용은 등과 교유하게 된다.
단재는 독립협회가 서울에서 개최한 만민공동회가 절정을 이루던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한다. 당시 단재는 내무부 문서부 소속으로 일하였는데, 이 부서에는 이상재, 신흥우, 김규식 등이 함께 있었다. 독립협회의 운동이 힘차게 진행될수록 정부의 탄압도 심해져 결국에는 여러사람들과 함께 단재도 검거되어 투옥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다행히 신기선의 후원으로 석방은 되었지만 처음 경험한 독립협회의 운동은 단재에게 오랫동안 성균관에서
공부하게끔 하지 않았다. 1901년 단재는 고향 근처 인차리에 신규식, 신백우와 함께 문동학교를 세워 젊은 청년들을 교육하여
나갔다.
1904년 고향에 있던 단재는 이하영 등이 황무지개간권을 일본에 팔아먹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성균관으로 다시
올라와 항일성토문을 작성하고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항일성토궐기를 한다.
1905년에는 성균관 합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박사를 받았지만, 곧 고향으로 다시 내려와 계몽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황성신문'의 발행에 참여하던 장지연의 권유로 황성신문 논설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황성신문에서의 단재 필치는 예리하고 강렬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한데 모았고, 이후 언론인으로서의 단재활동을
가늠케하였다. 1905년 을사5조약을 비난하는 장지연의 그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이 황성신문에 인쇄되고 난 뒤 황성신문은 무기 정간되었다.
이러한 상황의 단재를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로 초빙한 사람은 그 신문의 총무를 맡고 있던 양기탁이었다.
'대한매일신보'에서도 단재의 글들은 사회의 중요한 이야기 거리였다. 그 옛날 나라를 구했던 영웅들을 다시 살려내 현재의 나라를
구하려 하였던 단재는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최도통전'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이 글 모두는 서두에서부터 풍전등화와 같았던 나라의
운명을 건져보려는 단재의 소망이 한껏 들어간 명문들이었다.
역사가로서, 문학가로서 다방면에 걸친 단재의 재능이 돋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단재는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
'천희당시화', '소설가의 추세' 등을 발표하여 여러분야에 관한 자신의 관점을 독자들에게 선보였다.
단재는 1910년 1월 6일자 신문에 '한일합방론자들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마지막으로 하여 국내에서의
활동을 접고 안창호 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을 한다.
1910년 봄 신민회 간부들은 일제의 점점 심해지는 책동에 대하여 대응책을 논의하는 비밀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신민회는 어려워진 국내에서의 독립활동을 접고 국외로 나가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구체적 사업으로는 서북간도를 비롯한 시베리아, 미주 등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나아가 이들 지역에 동포들을 이주시켜 항일의 근거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1910년 4월 8일 단재는 일단 국내를 빠져나가 중국 청도에서 만나자는 계획에 따라 안정복의 '동사강목'만을 들고 김지간과 국경을 넘어 신민회 회의가 열리는 청도로 갔다. 향후 독립운동의 방향을 결정할 중대한 회의였던 청도회의는 독립운동에 대한 점진론과 급진론이 대두된 회의였고, 따라서 여러 대안이 치열하게 맞선 회의였다.
일주일동안 진행된 청도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길림성 밀산현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모든 독립운동의 기지를
이 곳에 두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종호의 출자금과 여러 각처의 성금을 통하여 농토도 마련하고, 무관학교도 세우려던 이들의 노력은 이종호의
포기로 결국 실패하고 망명인사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단재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다.
이 곳 블라디보스톡에서 단재는 '해조신문', '청구신문', '권업신문', '대양보' 등의 발행에 참여하면서
항일운동을 계속해나갔다.
단재의 몸을 돌보지 않는 활발한 활동은 단재의 쇠약을 가져왔고, 이러한 단재를 보다 못해 상해의 신규식이 단재를 불러들였다.
대충 몸의 기력을 회복한 단재는 신규식이 운영하던 동제사에서 잠시 머물면서, 신규식의 도움으로 박달학원을 개설하고 청년들을 가르쳤다. 박달학원은
단군의 얼을 살려 민족의 살 길을 찾아보려는 단재의 의식으로부터 시작한 교육기관이었다. 이 학원의 강사로는 문일평, 홍명희, 조소앙, 신규식
등이 초빙되어 교육을 담당하였다. 1914년 단재는 중국 망명 중 역사의식의 대전환을 맞는 기회를 갖게 된다. 윤세용·윤세복 형제의 초청으로
그들이 창설한 동창학교(東昌學校) 운영에 참여하기 위하여 환인현으로 갔던 것인데, 윤세복·신백우·김사·이길룡 등과 함께 백두산을 거쳐 만주를
돌아가는 대 여행을 가졌던 것이다. 백두산과 광개토대왕릉 등의 여행은 이후 단재에게 대고구려적인 사고를 갖게하는 귀중한 경험을 준다. 단재가
구상하던 고대사에 관한 새로운 인식이 시작되고 구체화될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이후
단재는 이상설·신규식·박은식·유동열·조성환·성낙형·이춘일 등과 함께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하고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지만, 이 조직의
활동이 실효성이 없음을 알고 역사연구와 문학적인 창작에 몰두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1916년 봄에 단재는 북경에서 중편소설 『꿈하늘』을
탈고하는데, 이 작품은 단재가 한놈의 입과 손을 빌어 나라의 독립운동전개를 상징적 수법으로 극화한 대표적 소설이다.
단재는 이 기간동안 대종교(大倧敎)운동에도 적극 가담하였는데, 대종교의 제1대 교주 나철이 구월산에서 일본
정부에 보내는 긴글을 남기고 자결하자 그 비통한 심사를 「도제사언문」(悼祭四言文)을 지어 바치며 달랬다. 그후 단재는 제2대 교주 김교헌과도
함께 대종교 교육에 참여하였으며, 이 일에는 유근·박은식 등이 함께 하였다. 후일 단재의 「조선상고사」는 대종교의 교본이 되기도
한다.
아끼던 제자 김기수의 죽음과 조카 향란의 혼인 문제로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돌아온 단재는 그후 북경의
보타암에 기거하며 역사연구에 매진하였다. 이때 벽초 홍명희는 남양군도에서 삼년간 방랑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였는데, 단재의 숙소를 자주들르며
평생동안의 남다른 우정을 나누게 된다.
한편, 임시정부의 수립에도 적극 참여하였던 단재는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추대되자 위임통치를 미국에 건의한 경력을 들어 이에 반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단재의 뜻과는 반대로 일이 성사되자 단재는 임정을 나와 임정을 비판하는 창조파의 맹장으로 활약한다. 또한, 임정이 발행하던
'독립신문'에 맞서 '신대한'을 창간하고 임정의 잘못된 노선을 비판하는 소위 '신대한사건'을 주동하게 된다.
1918년 12월 만주 동삼성(東三省)에서 활동하던 중광단(重光團)이 중심이 되어 국외의 독립운동 지도자 39명의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보통 '무오독립선언'이라고도 불리는 이 독립선언에 단재도 주요 인물로 참여하였다. 이 선언서는 무력투쟁이 유일한 독립운동임을 선언하여 2·8독립선언이나 3·1독립선언과는 내용적으로 달랐다.
1919년부터는 국내에서 발생한 3·1운동의 여파로 중국에 망명해있던 독립운동가들이 상해에 모여 통합된 임시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논의에 들어갔다. 단재는 임시의정원중 한사람으로 참여하면서 한성정부의 법통을 주장하였다. 논의가 계속되는 동안 임시정부의 초대 수반으로 이승만이
거론되자 단재는 그가 '없는 나라마저 팔아먹어,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 나쁘다'며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단재의 뜻과는 달리
의정원회의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추대되자 단재는 의정원 전원위원회 위원장을 사임하고 임시정부내의 준비론과 외교론에 대한 성토에
나섰다.
그러는 동안에도 단재는 대동청년단(大同靑年黨)을 재건하여 그 단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고, 대한독립청년단
단장, 신대한동맹단(新大韓同盟團) 부단주로 활발한 활동을 펴는 한편, 프랑스 조계 의영학교(義英學校) 교장이 되어 청년교육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임시정부와 맞섰던 신대한 사건을 계기로 상해 임정과 결별한 단재는 북경으로 돌아와 항일운동에 매진한다.
보합단(普合團) 조직에 참여하여 내임장(內任長)으로 추대되어 활동하는가 하면 독립운동의 행동대였던 '다물단'(多勿團)의 고문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다물단은 우당 이회영의 조카인 이규준이 몇몇 동지들과 만든 무장독립운동단체로 다물은 조국의 광복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었다. 단재는 이
다물단의 조직과 선언문의 작성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1922년에는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에 고문으로 가입한 단재는 의열단 선언인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한다. 일제에 대한 비타협적인 폭력투쟁으로 일관하는 의열단은 단재의 운동정신에도 부합하는 단체여서 단재는 흔쾌히 6천 4백여자에 이르는 이
선언서를 작성하게 된다.
단재는 조국 독립운동의 결실을 민중혁명으로써 이룰 수 있다고 판단하고, 1924년 북경에서 처음 결성된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의 기관지인 '정의공보'에 논설을 실으면서 무정부주의 운동에 관심을 나타냈다.
이후 단재가 관여하였던 통일전선체 신간회 운동이 무산되자 단재는 더욱 무정부주의 운동으로 경도된다.
1927년 남경에서 수립된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가입하였으며, 무정부주의 기관지인 '탈환', '동방' 등의 잡지에도 관여하며 적지 않은 글을
기고하였다.
1928년 4월 조선인 무정부주의자들의 베이징 동방연맹대회부터 단재는 본격적으로 이 무정부주의 혁명운동에
참여한다.
1920년 재혼한 부인 박자혜와 아들 수범을 불러 얼굴을 본 단재는 무정부주의 운동의 본격적인 활동을 위하여 공작금 마련을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된다. 결국 택한 방법은 외국위조지폐를 만들어 이를 폭탄제조소 설치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단재는 중국인 유병택이라는 가명으로
일본에서 이 위폐를 교환하려 하였으나 발각되어 대만 기륭항에서 체포된다. 2년 동안의 재판을 통하여 단재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죄수번호
411번을 달고 여순감옥에 수감된다.
형기를 3년 정도 앞두고 병이 악화된 단재는 결국 1936년 2월 21일 뇌일혈로 순국한다. 순국이전에 병보석으로 감옥문을 나설
기회가 있었지만, 보증인이 친일파라는 이유로 단재는 거부하였던 것이다.
일제로부터 우리 민족이 압박과 설움을 받던 시기동안, 수 많은 애국지사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살다 갔다.
그러나, 단재선생처럼 이론과 실천면에서 투철했던 지사는 드물었으며 특히, 일제와의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몸소 실천하다 끝내 감옥에서 순국한 선열은
더욱 드물다.
단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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